최정원목사 소개

  최정원(崔正元) 목사님은 한국 기독교 역사 가운데 하나님께 쓰임 받은 큰 목자 였습니다. 한국에 기독교가 전파되던 20세기 초 경북 선산군 장천면에서 장로교 3대째로 1911년에 태어나신 목사님은 4세인 어린나이에 성경을 읽기시작 했으며, 특별한 영적 은사를 받아 14세때 부터 대구 상동교회를 개척하여 강단에 서기 시작하여 능력으로 참 하나님을 증거 하셨고 많은 사람을 미혹의 영으로부터 해방 시켰습니다.

일제시대에는 국내는 물론 만주지역까지 왕래, 부흥집회를 인도하면서 일제의 학정을 피해 흩어진 동포들에게 신앙과 광복의 희망을 심어주기도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본인이 받은 수많은 성령의 은사에도 불구하고 성경말씀 중심의 신앙생활과 교회활동을 강조했으며 일제 말기인 1943년에는 대부분의 한국 기독교 교단들은 신사참배를 하였으나, 최정원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대구에서 투옥되었으나 최목사님을 재판하던 담당관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믿게되어 출옥했습니다.  출옥 후 이듬해인 1944년에는 만주 용정 등지에서 순회 부흥회를 인도하시면서 1945년 8월에 조선이 일제로 부터 해방되니 그 이전에 경기 이남으로 귀국하라고 전파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해방 후 격변기에는 교계 지도자들의 신사참배 문제로 혼란한 전국교계의 수습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6.25전쟁 때에는 교계 전국 전시대책 위원장직을 맏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신사참배를 거부한 목회자가 신사참배를 한 주류들 사이에서는 기득권을 유지 할 수 없었던 안타까운 현실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1952년 한국 기독교 성결교단으로 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임마누엘 예수교 교단을 창설하여 1950년대 대구 지역을 중심으로 공평동교회, 칠성동교회, 비산동교회, 봉산교회, 남덕교회, 동성교회, 포항중부교회등 여러 교회가 설립되었고 후진 양성을 위해 현재 대신대학교의 전신인 대구신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당시 최정원 목사님은 명성 그대로 전국에서 청함을 받고 있는 유명한 부흥강사였고 신학교수였습니다. 친히 개척해 세운 공평동교회는 성경박사로 통하는 최 목사님이 세운 신학교와 함께 소문난 교회라 전쟁과 가난으로 찌든 소망없는 서민들에겐 큰 위로와 소망이 있는 복음의 현장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세운 신학교는 당시로서는 대구 유일의 정부(문교부)인가 신학교로서 교파를 초월해 전국에서 영혼이 갈급하고 전쟁에 시달리던 젊은이들이 모여들었고, 시내에 있는 큰 장로교회에 나가는 현직 집사와 장로는 말할 것도 없고, 기업을 이루고 있는 공장장들에 이르기까지 계층을 초월해 청년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이 학교는 후에 대한 예수교 장로회 신학교(합동측)와 재단이 합해져 대신대학교(경산 소재)로 병합되었지만, 6.25 전쟁이 막 끝나고 혼란한 와중에서도 대구와 경남은 말할 것도 없고 멀리로는 호남지방에서까지 성경을 잘 가르친다는 최정원 목사님의 소문을 듣고 젊은 기독청년들이 모여들었었습니다.

이후 1967년 담임하던 공평동교회(현 봉산동교회) 및 일부 교회들과 제자들을 대한 예수교 장로회(통합측, 합동측)로 아무 조건과 욕심 없이 보내 주셨고, 목사님은 단신으로 전국을 순회하면서 수많은 부흥집회를 인도하셨습니다.
그후 미국과 서울에서 초교파적으로 성서강해를 지속하시면서 많은 교회를 설립하기도 하셨으며, 서울 반석교회를 지키시던 최정원 목사님께서는 2010년 3월 26일 향년 99세의 나이로 육신을 떠나셨습니다.
최목사님의 저서로는 ‘하나님의 최대은사’, ‘참 구원의 길’, ‘유다서(정통과 이단)’, ‘성탄을 통해 본 하나님’ 외 다수의 성서강해집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