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서 제6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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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 제6부

제 5 편 권면  20-23

성경은 천륜과 인륜의 두 부분으로 기록 돠었다.
대개 첫부분이 천륜이고 돌째 부분이 인륜이다. 특히 서간체의 성경이 더욱 그러하다.
천륜은 하나님과 인간과 만유에 대한 윤리이며 인륜은 인간과 인간 관계에 대한 윤리이다.

십계명도 1-4 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계명이고, 5-10 계명은 인간에 대한 계명으로 되어있다.
로마서를 보면 1-11 장은 천륜에 대한 말씀이고 12-16 장은 인륜에 대한 말씀이다.
이와 같이 유다서노 19 절 까지는 정통과 이단을 밝히 보인 후에 20 정 부터는 정통 신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기록한 것이다.

우리의 신앙 생활도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첫째요, 둘째는 우리 생활에 그 진리를 반영시키는 것이며
이 둘이 없이는 완전한 신앙을 이룰 수 없다.

1, 사랑하는 자들에게  20


사랑하는 자들아

사랑하는 자들이라는 말은 중생된 생명을 가진 부르심을 입은 자들끼리의 호칭이다.
이 말씀은 누구에게나 주신 것이 아니라 1 절과 2 절의 수신자를 제한함과 마찬가지로 권면 받는 자를 제한하였다.
중생된 생명이 없는 자에게 권면하게 되면 마치 개와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것처럼 진리를 거스리게 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에게만 권면하였다.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이다.

베드로는 예수에게 책망을 받았지만 돌아서지 않고 끝까지 따라 마침내 십자가를 졌다.
그러나 유다는 여러번 권고하여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나 예수를 배반하고 말았다.
아무리 귀한 하나님의 말씀도 중생된 생명이 없으면 연결되지 않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사랑하는 자들에게만 권면하신 이유가 이러한 것이다.

2, 자신에 대하여  20-21

20 :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21 :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권면에서 첫째는 자신에 대한 것이고 둘째가 타인에게 대한 것이다.
자기가 먼저 된 후에 다른 이를 위해 일하라는 말씀이다. 이는 전 성경의 철칙이다.

옛날 이사야는 그의 부정한 입술을 천사가 단의 숯불로 깨끗게 한 후에 일하였으며 (사 6 : 1-13 ),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빛과 음성을 보고 들은 후 깨끗함을 얻어 사도로 일하였다 (행 9 : 1-15 ).

예수의 산상 수훈에서도 먼저 자신의 체험인 마음 가난, 애통, 온유의 사모로 깨끗함과 배부름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후에 타인에 대한 긍휼, 청결, 화평을 말씀하셨다 (마 5 : 3-9 ).
또한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마 7 : 5 ) 고 하셨고,
주기도에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 6 : 12 ) 라고 하셨다.

예수 승천 직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행 1 : 4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 : 8 ) 고 부탁하셨다.
먼저 제자들 자신이 성령의 세례를 받고 권능을 얻은 후에 일하라는 말씀이다.

우리 자신을 먼저 디스린 후 다른 이를 위하여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러면 자신에 대한 4 가지 권면을 살펴 보기로 하자

1)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

자기 건축은 자립 신앙이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성경을 통하여 분별함으로 독신 신앙생활을 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이단 사설이 많은 말세에는 여러 거짓 선지자들의 유혹이 많으므로 미혹받기 쉬운 때이기 때문이다.
또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라고 하였다.
자극히 거룩한 믿음이 없으면 자립신앙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지위나 명예, 물질의 이권을 탐하는 거룩지 못한 자들은 독립신앙을 가질 수 없다는 말이다.
자립신앙은 거룩한 믿음을 가진 자들만이 가능하다.
지극히 거룩한 믿음은 하나님과 성경만을 믿는 믿음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개끗함을 얻고 성령의 역사와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진다.
안목의 정욕과 육체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서 떠나 하나님과 그의 말씀이신 성경에만 복종하여 하나님에게만 속하고
사람에게는 속하지 않는 믿음을 말한다.
마귀가 예수에게 시험하던 경재문제, 신비문제, 권세문제를 물리치고 오직 말씀과 그 말씀을 이루려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뜻에만 따르는 믿음을 말한다.

엘리야때에 거룩지 못한 신안을 가진 850 명의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왕 아합과 왕후 이세벨이 초대하는 궁중 출입을 영광으로 알았다.
그들은 왕과 왕후의 마음을 기쁘게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여 왕후가 시키는대로 하였다.
그래서 바알과 아세라 목상을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으로 온 이스라엘을 거기에 경배하도록 인도하고 있었다.
온 이스라엘 국민은 그들을 참 하나님의 선지자로 알았다.
그러나 홀로 하나님만 믿고 그 뜻에만 복종하는 엘리야는 옷 한벌에 산과 시내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며 왕을 충고하고
거짓 선지자들을 책망하며 이스라엘 국민을 하나님께로 바로 인도하는 지극히 거룩한 믿음을 가졌었다
때로는 먹을 것이 없어 죽게 되었을 때 그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이 천사와 까마귀를와 사렙다 과부를 통하여 그를 살게 했다.
사십 년을 일하였으나 아무도 그를 따르지 않았다.
승천 직전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엘리사 한 제자를 얻은것 뿐이었다.
일반 신자가 아니고 지도자인 선지자들의 세계에 거룩하지 못한 자가 850 명이요,
거룩한 믿음을 가진 자는 엘리사까지 합하여 겨우 두 사람이었다 (왕상 17 :, 19 : 16 )

또한 거의 같은 때 영을 받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401 명 있었다
그 중의 400 명은 역시 왕과 왕후의 초청을 영광으로 알고 왕의 마음을 사기 위하여 일하였다.
그들이 거짓말하는 영을 받아 왕에게 틀린 예언을 하면서 미가야 선지자의 빰을 때리는 혈기를 부렸다.
그러나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는 미가야는 하나님의 영으로 정확한 예언을 하고 빰을 맞으면서도
진리로 저들을 깨우쳐 책망하였다 (왕상 22 : ).
이와 같이 하나님만 의지하고 믿는 거룩한 믿음을 가진 종들은 모두 자립신앙으로 살았다.

모세는 애굽의 왕위와 재물을 버리고 단신으로 미디안 광야에서 사십 년을 지내다가 부르심을 입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왕족이요 대문학자이며 대선지자였다.
오십 여년을 정계와 교계의 미움을 받으며 단신으로 자립신앙을  지속하였다.
예레미아 선지자도 46 년을 정계와 교계의 맹열한 박해를 받으며서 끝까지 거룩한 믿음을 지켰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사탄의 3 가지 성공 비결을 거부하시고 예루살렘 종교계를 책망하시고 탄식하시면서
머리 둘 곳과 깃들 곳도 없이 지내셨다.
요한은 증거 하기를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치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심으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라” (요 2 : 24-25 ) 고 하였다.
지극히 거룩하신 그는 단신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실 역사를 이루신 것이었다.

초대교회 사도들을 위시하여 지금까지 거룩한 믿음을 지닌 성도들은 화평한 사람들이면서 자랍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저들은 홀로 십자가의 험한 길을 걸어왔다.

거룩지 못한 자들은 단체와 교계 안에 있는 명예와 지위와 이권을 얻으려 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서로 싸우며 또 아첨한다. 단체와 교계의 인물들의 환심을 사야 하기 때문에 독립신앙을 유지할 수 없다.

창세 이루부터 지금까지 거룩한 믿음을 가지고 자립신앙을 지닌 자들은 거룩지 못한 자들에게 핍박을 받아왔으니
이 일은 세상 끝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자립신앙에는 지극히 거룩한 믿음이 절대 유일한 원동력이 된다.

본서에 가만히 들어온 자, 곧 3 단체와 3 개인, 사도들이 예언한 정욕의 거짓 선지자들이 많을 때에는 거룩한 믿음을 가진
천사장 미가엘,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 그의 말씀만 믿고 순종하는 거룩한 믿음 위에 독립신앙을 지켜야한다.

2) 성령으로 기도

이단의 유혹이 많은 때에는 성령으로 기도할 수 있는 자라야 자립신앙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성령으로 기도하지 않고 인간의 감정이나 악령으로 기도하는 자들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기도 하지 않은 자들은 이단과 거짓 종들을 참 종으로 믿고 따르며 자립신앙을 갖지 못하고 망하게 된다.

성령은 기도하시는 신이시요 또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는 신이시다.
바울 사도는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 : 26 ) 고 하였다.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에도 성령이 역사 하셨으니 마태는 그가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서 40 일을 금식하시고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다고 기록하였다 (마 4 : 1-11 ).
누가도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아버지께 기도하신 일을 보여 주고 있다 (눅 10 : 21-22 ).
이처럼 예수의 기도에도 성령의 역사가 반드시 있었다.

하물며 연약하고 빌 바를 알지 못하는 인간들이야 성령 없이 어떻게 바른 기도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성령없는 기도는 인위의 소행에 불과하며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기도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기도는 받드시 성령으로 하여야 한다.

기도는 인간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노력이며 하나님께 말씀 드리는 일이다.
기도의 유일한 바른 길은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인도하시는 성령의 감동으로 된다.
이에 대하여 예수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 14 : 26 ). 고 하셨다.
성령이 말씀을 알게 하시고 생각나게 하신다는 것이다.

바울은 성령께서 우리가 연약하고 빌 바를 알지 못함을  도우시며 친히 간구 하신다고 하였다 (롬 8 : 26 )
솔로몬왕도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는 가증하니라” (잠 28 : 9 ) 고 하였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감동에 의해 쓰여졌다.
성령의 감동으로 된 율법을 듣지 않음은 말씀과 성령을 동시에 거부하는 일이다.
말씀과 성령 없이는 절대로 바른 기도가 될 수 없다. 오히려 그 기도는 가증하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호흡이다.
호흡이 없는 생명은 죽은 것이요, 호흡을 중단하면 죽는다.
그리고 기도는 음악이나 웅변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이다.
대화는 피차 말을 나누는 일이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확실한 말을 듣고 일어나야 한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이므로 몸가짐과 말을 경건히 하여야한다.
만일 난잡하게 머리와 손을 흔들며 큰 음성으로 소란케 하는 것은 저급한 인간의 감정작용이다.
존경하는 사람 앞에서도 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기도자의 모습은 성화 한폭같이 거룩하여야 하며 그 음성은 진실하고 신령하여야 한다.

기도는 최대의 노동이다.
하나님을 움직이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능력있는 기도의 종들은 최대의 노력으로 기도 하였다.
단신으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모세는호렙산에서 두 번이나 40 주야를
물도 마시지 않으며 기도하였다 (신 9 : 9-20, 16-18, 출 24 : 18, 34 : 28 ).
여덟 가지 권능을 행하며 죽지 않고 승천한 엘리야는 40 주야를 행하여 호렙산 굴에 이르러 하나님과 교통하였다 (왕상 19 : 8-9 ).

예수께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실 때 광야에서 40 일을 금식하셨고 (마 4 : 1-2 ),
새벽 오히려 미명에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 하셨으며 (막 1 : 35 ),
열 두 제자를 선택하실 때에는 산으로 가셔서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 하시고 밝을 때 제자들을 부르셨다 (눅 6 : 12-13 ).
또한 9230 척의 높고 눈덮힌 헐몬산에 오르사 기도하셨으며 (마 17 : 1-8, 막 9 : 2-8, 눅 9 : 28-36 ),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는 고민 하시고 슬퍼하시며 죽게 되기까지 힘써 기도하셨다 (마 26 : 36-46 ).

이에 대하여 누가는 예수께서 무릎을 꿇고 기도 하실 때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으며 하늘로 부터 사자가 나타나 힘을 돕더라고 하였다(눅 22 : 41-44 ).
뿐만 아니라 그 괴로운 십자가 위에서도 인류를 위하여 기도하셨으며 (눅 23 : 34 ),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신다 (막 16 : 19, 행 7 : 55-56, 롬 8 : 34, 엡 1 : 20 ).

모든 성도들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밀씀에 의하여 힘써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말씀을 근본으로 하지 않고 또  성령  없이하는 바른 기도는 있을 수 없다.
예수께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 15 : 7 ) 고 하셨다.

이단 곧 거짓 종들은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로 성령은 없는 자들이니 기도아닌 기도 밖에 할 수가 없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은 잘못된 기도를 성경 중에서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첫째
, 기도의 대상이 우상이었다.
모세때 아론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금송아지 (출 32 : ) 와 사사시대 미가 집의 금쥐 (삿 17 : )
그리고 아합왕 때 바알과 아세라 (왕상 18 : ) 앞에 이스라엘이 제사하며 기원한 것을 여호와께 경배한 것으로 알고 하였던 것이다.
이방인들이 우상을 섬기는 내용과는 다른 것이었다.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으로 믿고 우상을 섬기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마음과 입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뜻으로 그 우상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섬긴다는 자들의 우상화는 형태는 다르지만 내용은 같으니 하나님께 경배하고 섬긴다는 것이 하나님 보다
단체, 교회, 교파, 인간의 학설 앞에 무릎을 꿇어 마음과 몸과 재산을 바쳐 섬기고 있다.

둘째
, 잘못된 기도이니 고라는 패역한 마음으로 자기 야심을 이루려고  자신있게 자기대로의 기도를 드리다가 땅이 입을 벌려
삼킨바 되었고 (민 16 : ) 바알 선지 450 명은 큰 소리로 부르고 칼과 창으로 몸을 상하여 피를 흘리며 진언을 하며 기도했으나
응답을 얻지 못하고 기손 시내에서 죽었다 (왕상 18 : ).
시드기야를 중심한 400 명은 거짓말하는 영을 받아 거짓 예언을 하였다 (왕상 22 : ).

교계에도 거짓 영 또는 악령을 받은 자들은 맞지 않는 예언을 하며 혈기로 저주와 악담과 사람을 치는 행위를 하고있다 (왕상 22 : 24 ).
성령으로 기도하는 성도들은 혈기로 싸우지 않고 진리를 가르쳐 반드시 이루어질 정확한 예언을 한다.

발람과 사울왕은 때로는 성령으로 기도하며 바른 예언을 할 때도 있었으나 버린 바 되어 망했고 (삼상 15 :, 민 22 :-25 :, 32:,
벧후 2 : 15-16, 계 2 : 14 ) 에서는 눈물로 구하였으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히 12 : 16-17 ).

외식자의 기도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고 (마 6 : 5 ), 이방인의 기도는 중언 부언한다 (마 6 : 7-8 )
이러한 인위적인 기도가 교계에 많다
기도는 하나님만 들어시게 그와 대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없는 자들은  사람들이 듣기 좋게 꾸며서 하며 정욕적인 야심을 이루려고 말을 간교하게 만들어 한다.
때로는 슬픈 음성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또 웅변식으로 할 때도 있다.
흐트러진 자세로 사람 앞에서도 못할 망동을 한 후 하나님과 교통하였다고 한다.

이방 종교인들도 인위적인 우상을 섬길 때 주문, 진언 또는 제문을 통하여 기원을 하였다.
그들에게도 기사, 이적과 예언, 방언, 진동등이 일어났다. 이를 강신이라고 한다.
기독교 안에서 성령 없는 자들도 찬송과 기도를 몰아쳐 되풀이 하면 위와 같은 일들이 생긴다.
이는 성령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이 극에 이르러 일어나는 한 현상이다.
그러나 이들이 교회에 속한 신자라는 점과 그 방식이 찬송과 기도였기 때문에 성령 받은 기도자들로 오해되어 미혹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이방 종교인들이 주문과 진언을 강신이 될 때까지 되풀이하여 외우듯이 찬송과 기도를 감정의 선을 넘을 때까지
하게 하여 인간적인 신비를 경험시킨다.

또한 성령 없는 자들이 악령을 받아 기도자들이 가지는 신비한 역사와 비슷한 일들을 행하며
성령으로 기도한 자들인양 사람들을 속여 미혹한다.
이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니기 때문에 속기 쉽다.

어떤 자들은 아무 체험도 없으면서 들은 지식으로 경험자처럼 거짓말하며 속이고 다닌다.

이상과 같이 거짓자들과 그들은 따르는 무리들은 서로 속고 속이며 스스로 도취하며 모이면서 물욕과 이성 문제들에 얽혀있다.
이것을 성령의 역사로 선전하고 또 믿는 자들이 허다하다.

성령없는 기도는 죽은 기도이다.
그들은 자기가 드린 기도의 내용과 전혀 상관 없는 생활을 한다.
“전능하시고 무소 불능하신 하나님” 이라고 부르짓으면서 조금만 어려운 일이 닥쳐도 그들에게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없게 된다.
낙심하여 별일을 다하며 돌아다닌다.
또한  “불꽃 같으신 눈으로 사람의 은밀함을 보시고 하시는 하나님” 이라 기도하면서
사람의 눈만 없으면  잘못된 일에도 아무 거리낌이 없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눈은 상관이 없고 사람의 눈만을 조심하는 행동인 것이다.
그들은 “천금보다 만금보다 귀한 생명의 말씀” 또는 꿀보다 더 달고 꿀송이 보다 더단 하나님의 말씀” 이라면서
성경을 열심히 읽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천금 만금이 훨씬 귀할 것이다.
겟세마네 동산까지, 골고다까지, 순교의 마당에까지 가게하여 달라” 면서 그리 어렵지 않은 교회에도 잘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안일하고 행복한 곳에 가려고  밤낮 헤메고 있다.
그리고 찬송할 때에도 “늘 웃어도 눈물로써 못갚을줄 알아 몸밖에 드릴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하면서
주님의 복음과 인류 구원을 위하여 무엇을 드리는가 ?
이와 같은 그들은 죽은 찬송과 기도를 자기도 모르게 열심히 하고 있다.
그들이 이같이 하는 것은 그들에게 성령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위와 악령에 의한 어떤 신비를 체험하고 행하여도 거룩해 질 수가 없다.
도리어 칠배나 악하게 된다. 이는 새롭게 하시는 성령이 없기 때문이다.
육은 육이요, 신은 신이니 할 수가 없다.
겉으로 경건한 모양을 꾸미지마는 능력이 없다.
그들은 멸말케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이고 호색하는 것을 쫓으며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신자들로 이를 삼는다.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을 채우는데 연단된 자들이다.
하나님의 교회와 참된 종들을 망하게하려 하고 자기의 이익을 구하는 발람이다.
그리고 거짓종 곧 성령없이 인위적으로 된 거짓종들은 강단에서 만담, 패설로써 신자들을 웃기고 울리며 두렵게하려고
연극을 한다.
군중들의 동태가 유혹 할 수 있게 되어 가는가를 살피면서 계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약간의 지식을 가졌다고 자처하는 자들은 성경을 중심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인간들의 비성서적 학설을
열거하며 가장 귀한 하나님의 종처럼  오만 무례히 행한다 (딤후 4 : 3-4, 골 2 : 3, 4, 8 ).

말세에 기독교 안에서 종과 신자라는 이름으로 성령 없이 활동하는 거짓 종들과
그들을 참 종이라고 믿고 따르는 자들이 온 세계에 가득할 것이다.
기도는 처음부터 성령의 감동으로 하는 유일한 길밖에 다른 길이 없다.
말세 이단이 가득한 때에는 더욱 성령으로 가도하라는 말씀이다.

3)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킴

이는 세번째 자신에 대한 권면이다
인간은 주구나 자기가 자기를 잘 지켜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어느때 어디서든지 마찬가지이겠으나 혼란한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왜냐하면 자기를 잘 지키면 살고 지키지 못하면  죽고 망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기를 지키는 것도 천태만상이다. 불신자는 인간의 지혜와 갖가지 방법을 동원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절대적이 될 수 없으며 설혹 기대 이상으로 잘 지켰어도
그것은 찰나의 순간 속에서의 육체문제 즉 현세적인데 그친다.

본 항에서 뜻하는 바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자기를 하나님의 사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지키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사랑 밖으로 나가면 파멸이 있을 뿐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 안” 이라는 말씀을 알아보자.
본서에서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은 자를 부르심을 입은 자라 하였고,
부르심을 입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라고 하였다.
즉 “부르심을 입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 (1) 라고 하였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밀씀에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자라는 것은  그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고
외적 생활의 유일한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도록 지키심을 얻은 자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 밖에 있는 자라는 말은 그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고
외적 생활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지 않고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를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일이 자기를 지켜 축복과 구원에 이르게 된다.
허지만 하나님의 사랑 밖에서 자기를 위하여 사는 일은 자기를 지키는것 같으나 자기를 지키지 못하고 잃어 버려
화와 멸망에 이르게 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킨다는 말속에는 이러한 뜻도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여  그 사랑에 감격한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살게 되며 그 사랑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 사랑 안에 거하여 살고 밖으로 나가지 않음이  자기를 지키는 유일한 길이라는 말이다.

인간들도 사랑하는 사이에는 피차 안에 거하며 밖에 있지 아니한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만이 자기를 지키는 길이다.

인간들이 자기의 귀중한 소유물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며 잃을 때에는 크게 근심한다.
그러나 자기를 잃지 않으려고 지키는 일은 소흘히 하며 또 자기를 잃은 것에 대하여는 거의 무관심하다.
실로 가련한 일이다.

유다는 이단들과 거짓 단체들에게서 자기를 지키되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고 강력히 부탁하였다.

옜날 하나님의 사랑으로 창조된 에덴 동산에 살던 아담과 이브는 사탄의 유혹에서 자기를 지키지 못하였다.
이브는 사탄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사랑 밖으로 떠났고 아담은 이브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 밖으로 나갔다.
저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그 사랑의 말씀 밖으로 나간 것이 결국 에덴 동산을 지키지 못하고
자기들을 지키지 못하여 자기들의 축복을 지키지 못하는데 이르렀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자기를 지키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 밖에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나가는 것이며
하나님 밖에 나가는 것이 자기를 지키지 못함이 된다.

하나님의 사랑 밖에 나가 자기를 지키지 못한 자들에 대하여 기억하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면서 그 사랑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 은혜를 변하여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떠나 세상의 썩어질 사랑 안에 들어간 자들이 많다.
즉 하나님의 말씀 밖으로 나간 자들이다.
정욕으로 썩어질 육체인 자기를 지키려 하는 가련한 자들이다. 결국 자기를 지키지 못한 자들이다

본서의 3 단제인 주의 백성과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처소를 떠난 천사들과 소돔과 고모라 백성들이 여기에 속한다.
3 개인 곧 가인과 발람과 고라 같은 자들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떠난 자들이며 하나님의 말씀 밖으로 나간 자들로서
자기를 지키지 못하여 멸망 하였다. 에서와 가롯 유다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현세의 사랑 안으로 들어간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킨 성도들이 결코 없지는 않다.
본서에서 살펴보면 천사장 미가엘이니 저가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변론할 때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주께 맡겨 하나님 안에 있었고 에녹도 그의 말씀 안에서 자기를 지켰다

옜날 욥은 하루 아침에 전 재산을 잃고 10 남매가 죽으며 몸에는 종기가 나서 잿구덩이에 앉아 몸을 긁으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그는 오히려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며 자기를 지켰다.

요셉은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에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창 39 : 9 ) 하여
육체의 정욕에 끌리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자기를 깨끗히 지켰다.
그로 인해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애굽의 총리 대신이 되었던 것이다.

다니엘은 사자글에 던져 우기까지 제1계명을 지켜 다른 신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만 섬겼다..
자기를 하나님 안에서 떠나지 않게 지킬 때 하나님도 그를 사랑 하셔서 천사를 보내 사자에게서 지키시고
바벨론의 최고 존경을 받게 하셨다.
다니엘의 3 친구들도 7 배나 뜨거운 풀무 불에  던지우면서도 제 2 계명인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자기들을 지켰으므로
하나님도 그들을 사랑하사 불속에 함께 계시고 지켜 구원하셨다.

초대교회가 로마 황제의 핍박을 받던 때에 그 유명한 로마제국의 중신이며 믿음의 사람인 죤 폴리갑이 있었다
그에게 자기를 심히 사랑하고 아끼는 황제가
“당신은 나의 중신이니 신앙을 가져도 좋으나 나의 명으로 된 법이니 잠간만 거짓으로라도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하라” 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는 조용히 “예수께서는 저의 80 평생에 거짓으로라도 저를 사랑 하지 않는다고 한번도 말한 적이 없는데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겠다고 거짓말 할 수 없읍니다” 하면서 마침내 순교 하기까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켰다.

바실은 핍박하는 황제가 “네가 끝까지 예수를 믿게다면 재산을 몰수 하리라” 할 때에
그는 “황제여, 불쌍한 인류가 많은 이 세상에 두 벌 옷을 둘 수가 없어 이미 있던 재산을 나누어 주고
지금 입은 옷 한 벌 밖에 없으니 원하시면 곧 벗어 드리리다” 고 대답하였다.
황제는 분노하여 “그를 무인 절도로 유배시키라” 고 하였다
바실은 “하나님은 계시지 않은 곳이 없으시니 제게는 무인 절도가 없나이다” 라고 굽히지 않았다.
이때 황제는 더욱 분개하여 “그를 당장 내 앞에서 사형시키라” 하자
바실은 앞으로 몇 발자욱 더 나아가
“황제여 저같은 자가 순교의 자격이 있나이까” 하면서 순교함으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켰다.
그 후 지금까지 온 세계에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또 그의 말씀 안에서 생사를 다하여 자기를 지키는 자들이 계속되고 있다.

지금도 사탄은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찿고있다 (벧전 5 : 8 ).
그리고 사탄은 언제든지 누구에게나 3 가지 유혹 곧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인간을 망하게 한다. (요일 2 : 16 ).
이 3 가지 유혹으로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자기를 지키지 못하게 하였으니
하와가 선악과 나무를 본 즉  먹음직도 하고 (육신의 정욕 ), 보암직도 하고 ( 안목의 정욕 )
지햬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하였다고 ( 이생의 자랑 ) 창세기 기자는 말하였다 (창 3 : 6 ).

예수 앞에 나타난 마귀는 인류를 구원하실려는 그에게 돌들로 떡이 되게하라 (육신의 정욕 ),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 ( 안목의 정욕 ),
엎드려 경배하면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주리라 (이생의 자랑 ) 고 하였다 (마 4 : 1-11 ).
이와 같이 아담의 때와 예수의 때, 세상 끝날까지 이 3 가지 유혹으로 사탄은 인간을 망하게 한다.

우리는 사탄의 3 가지 유혹에서 자기를 지키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켜야 한다.
우리의 눈과 귀와 입과 마음에 파스꾼을 세우고 보고 듣고 말하며 생각하는 것을 일일이 검토하여 자기를 지켜야 한다.
파수꾼은 오직 말씀과 성령의 감동으로 세워야 한다.
말씀에 비추어 보면  성령의 감동을 소멸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는 것이며하나님을 알고
그의 지극히 크신 사랑을 알 때 그 안에서 떠나지 않고 자기를 지키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 : 1 )
하나님의 자비를 맛 본 자들은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는 것이 당연 하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사탄의 유혹에서 자기를 지키지 못한 자들의 대열에 속한 자가 될까 두려운 마음으로 힘써 싸워
사탄의 유혹에서 자기를 지켜 승리한 자들의 반열에 들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사탄의 유혹에서 자기를 지켜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또 그가 어떻게 이기셨는가를 살펴 그대로 실핼할 때 우리도 이길 것이다.

우리는 아담 안에 있는 자가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사랑 밖으로 나가지 말고 그 안에서 자기를 지켜야 할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인류에게 알려 그 사랑을 알고 그 사랑 안에 돌아 오기를 권하는 말씀으로 가득하다.
옛날 노아는 당시의 인류에게 방주로 들어오라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였으며,
모세는 법죄한 이스라엘 국민들에게,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도 하나님 사랑 안으로 돌아 오라고 외쳤다.

예수께서는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 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눅 15 : 1-24 ) 고 가록하였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 허랑방탕한 인류를 아버지의 사랑 안에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는 말씀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신랑과 신부의 사랑으로 표현하셨다.
곧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마 25 : 1 ) 라고 하셨다.
사도 요한도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계 19 : 7-8 ) 고 하여
하나님과 인간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사랑으로 표현 하였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지시로 창녀 고멜과 결혼 하였다.
고멜은 다른 남자를 따라 달아 났으며 그 때마다 하나님은 호세아로 하여금 전곡을 가지고 가서 다시 데려 오게 하셨다.
이 말씀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서 세상의 사랑을 따라 달아나는 고멜과 같은 인간들을 하나님은 독생자의 피로 다시 사서
다시 하나님 안에 돌아오게 하신다는 부부애의 표현이다.

아가서를 쓴 솔로몬 왕도 하나님의 감동으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게계를 부부애로 표현하였다.
그는 ”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아 8 : 6-7 ) 고 사랑의 절대성을 보였다.

사도 바울은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고전 13 : 8 ) 하였고
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 8 : 35 ),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 : 38-39 ) 고 말하였다.

위의 솔로몬왕과 사도 바울이 증거한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결코 버리지 않으시며
끊어지게 하지 않으시고 절대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지켜 주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또 이로 인하여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성도들도 절대로 하나님의 사랑 밖에 나오지 않고 그 안에 산다는 말씀이다.
예수께서도 온 인류를 구하시기 위하여 사명을 맡기신 베드로에게 3 뱐이나 가듭 사랑의 여하를 문답 하시고
사명을 맡기시며 죽음 까지 요구하셨다 (요 21 : 15-23 ).
사랑이 없는 사이에는 부탁 할 수가 없으나 사랑이 있는 사이에는 피차 죽은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자는 자기를 넉넉히 지키게 되는 것이다.

4) 영생에 이르도록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림 

자기에 대한 4 째 권면이다.
영생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지혜와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로만 가능하다.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고 자기를 지키라는 3 가지 권면도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려 얻어야 한다.
특히 이단 곧 가만히 들어온 자들이 많은 때에 영생에 이르기 어렵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이 없이는 바른 믿음의 길로 영생에 이를 사람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긍휼을 기다리라고 하였다.

긍휼은 불쌍히 여겨 도와 준다는 뜻이다.
절대자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은 그 지혜와 힘이 가련하다. 하나님의 도와주심이 없이 영생에 이를 수가 없다
정통적인 바른 믿음을 가진 신자들은  자기의 연약을 알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린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는 자립 신앙과 성령으로 신령한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켰어도 자만심을 갖지 말라는 말씀이다.
거기서도 멸망에 떨어지는 이단에 미혹될 수가 있으니 겸손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려 영생에 이르도록 권면하였다.

3, 타인에 대하여   22, 23

22 :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23 :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여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1)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길 것

의심하는 자들이라 함은 변별할 힘이 없어 정확한 소신을 가지지 못하는 자들을 말한다.
그리하여 바른 것과 그른 것 곧 정통과 이단을 잘못 분간하는 위험이 있는 자들이다.
사실 그들의 마음에는 악한  계획이 없이 이단을 정통으로 잘못 판단하여  거기에 물심신으로 충성한다.
어찌 불쌍하지 않으며 어찌 내버려 둘 수가 있을 것인가.
그래서 이러한 자들을 긍휼이 여기라는 말씀이다.

긍휼이라는 말은 불쌍히 여겨 도와 준다는 뜻이다.
이 긍휼이라는 말은 어느 나라의 풀이에서나 같은 뜻을 지닌다. 그 중에도 한문은 글자 자체가 그 뜻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즉 긍은 “불쌍히 여길 긍” 이며, 휼은 “불쌍히 여길 휼” 이라고 하지만 “도와 줄 휼” 로도 통한다.
합치면 긍휼은 불쌍히 여겨 도와 준다는 말이다.
여기서 도와 준다는 “휼 ” 자는 마음심 변에 피혈자를 합쳐  만들었다.
마음과 피 곧 심혈을 주는 것이 긍휼이라는 뜻이다.

마음으로만 불쌍히 여기고 주는 것이 없다면 도움이 못된다.
또 약간의 물질을 주었다고 해도 마음으로 하지 않았다면 엮시 긍휼의 뜻이 결여 된다.
먼저 마음이요 그 다음이 물질이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긍휼이 여기시어 독생자를 보내 주셨고, 성자께서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어 생명을 버려 피 흘려 주셨다.
이긍휼을 입은 자들은 또한 다른 이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까지 긍휼의 생활을 하게 되어진다.
사도 요한은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일 3 : 16 ) 고 하였다.

이와 같이 유다는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고 권면한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들어온 이단들 곧 가인, 발람, 고라같이 잘못된 지도자들은 의심하는 자들을 유혹하여 생명과 재산을 해친다.
그들에게는 긍휼함이 없다. 무자비 할 뿐이다.
성도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자비하심 같이 항상 긍휼히 여기는 자들이다.

2) 불에서 끌어 내어 구원할 것

여기에서 말하는 “불”은 좋은 불이 아닌 이단의 불에서 끌어내라는 말씀이다.
옛날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레 10 : 1-2 ) 고 하였다.
나답과 아비후는 제사장이었으며 또 그들이 여호와께 분향한 일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제단에 있는 성화가 아닌 다른 불 곧 여호와가 명하지 않은 다른 불로 분향한 그것 때문에 이단으로써 죽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현대 교계에 하나님이 명하신 66 권의 성경 말씀이 아닌 다른 말들과 또 성령이 아닌 악령과 인간의 신비로
성령의 역사와 비슷한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바로 다른 불이며 이단으로 가만히 들어온 자들의 종교운동이다.
그러한 불에서 끌어 내라는 말씀이다.

모세를 배반한 고라가 250 향로에 불을 담고 향을 그 위에 두고 온 회중을 회막문에 모아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였다.
그때에 여호와에게서 불이 나와 분향하는 250 인을 소멸 하였다 (민 17 : 17-35 ).
고라도 레위 자손으로서 제사장의 자격이 있고 분향할 수 있다.
다만 하나님이 세우신 종을 거스리고 자기가 높고자 하는 마음으로 분향한 그것이 자기를 소멸케 했을 뿐만 아니라 250 인도 함께 망했다.
그리고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모세의 말을 듣고 고라를 피하여 도망한 자들은 심판의 불에서 구원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이단자인 교역자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종을 가스려 자기의 욕망을 달성하려고 종교행사로 하나님께 예배의 봉사를 하며
회중을 자기에게로 모으려하는 열심이 불같이 뜨겁다. 그러한 이단의 불에서 끌어내야 한다.

올바른 정통의 신자들은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 같은 속성이지만 가만히 들어온 이단자들은
가시나무같은 성격을 버리지 못한다.
사사시대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왕이 되려는 욕망으로 형제 70 인을 한 반석 위에서 죽였다.
그때 숨어서 생명을 보전한 한 아들 요답이 아비멜렉을 가시나무로 비유하여 외치기를
“이에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의 왕이 되라 하매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왕을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 (삿 9 : 14-15 ) 고 기록하였다.
아비멜렉의 욕망이 불이 되고 가시가 되어  친형제 70 인을 한 반석 위에서 죽이는 일까지 생겼다.
교계의 잘못된 거짓 종들이 자기의 명예와 지위와 이권을 얻으려고 정욕의 불과 가시를 가지고 이리의 입을 벌려
자기 아래 있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불사르고 찌르며 물려고 한다.
이러한 이단의 불에서 끌어내라고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죄는 불로 해석된다 .
여호수아 대제사장에 대하여 하나님은 그를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라고 하셨다 (슥 3 : 2 ).
즉 거룩한 불 외의 모든 불은 죄의 혓바닥이며 죄의 입기운이다.
지옥불에서 기인되기 때문이다 (약 3 : 6 ).
그러므로 성도들은 인간을 죄에서 끌어내는 것이 불에서 끌어냄이 된다.

또한 불에서 끌어내라는 말 속에는 현재 죄와 이단의 불 가운데서 타고 있음을 말한다.
여기서 3 가지의 귀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는, 불과 불속에 있는 사람은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불에 타고 있는 사람은  불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죄악과 이단에 잡혀 있는 인생은  죄의 불도 이단의 불도 아니다.

들째는, 죄와 이단의 유혹에 빠져 있는 사람을 끌어내라고 하였으니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한번 죄와 이단에 끌리면 전혀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체념한 사람들에게 이 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을 것이다.

셋째로, 성도들의 사명이다.
죄와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힘을 다하여 끌어내라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야 할 것이다.

3) 두려움으로 궁휼히 여길 것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는 말은 육신의 정욕 곧 간음과 다른색으로 더럽혀진 옷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죄를 미워할 것이요 사람을 미워하라는 말이 없는 점이다.
일반 사람들은 사람을 미워하여 죄를 만들어 싸우기까지 한다.
성도는 자타간 죄는 미워하고 생명은 사랑한다.

그리고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고 하였다. 긍휼히 여기며 두려움으로 하라는 말슴이다.
성적 부도덕한 생활로 유혹하는 자들에게 잡혀 있는 사람을 도와 긍휼히 여기되 조심하여 두려움으로 하라는 말이다.

두려워하라는 것은 위험하다는 뜻을 내포한다.
가만히 들어온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변하여 색욕거리로 바꾸는데 익숙한 자들이다.
그들에게 빠져있는 자들을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는 말이다.
이단에 속아 그들의 산하에 있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려고 할 때 두려움으로 해야한다.
잘못하면 자기도 이단에 미혹 받을 위험이 있고 또 그들 중의 어떤 이를 긍휼히 여겨 접근 할때
그의 지도자인 이단을 접촉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이것이 매우 두려운 일이다.

사도 요한은 ”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요이 10 ) 고
이단에 대한 주의를 말하였다.
행음자에 관하여 사도 바울은  그들과 사귀지도 말고 함께 먹지도 말라고 하였다 (고전 5 : 11 )
바울이 이렇게 심하게 말한 이유는 그들을 접촉함이 위함하다는 뜻이 있응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사도 요한이 목욕하는 곳에 한 이단자가 들어 왔다. 그러자 요한이 급히 피하였다.
그가 요한에게 왜 그렇게 도망가는가를 묻자 요한은 “이단자 있는 곳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까 두려워 함이라” 고 대답하였다.
이단자들에게 미혹받은 영혼들을 긍휼히 여겨야 하지만 두려움으로 하여야 할 것이다.

제 5 편 송 영     23, 25

1, 하나님께   24, 25

24 :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25 :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의 모든 궁극 목적은 인류로 하여금 그에게 찬양하게 하시며 찬양을 빋으시는데 있다 .
시편 기자는 마지막 장 150 편에 13회의 찬송으로 시편을 맺는다.
바울은 하나님께 삼위를 찬송하게 하신다고 하였으며 (엡 1 : 3-14 ), 바드로는 찬송하라고 하였고 (벧전 1 : 3-4 ),
요한은 시온산의 노래를 알려 영원한 때의 찬양을 보여준다 (계 13 : 1-3 ).

여기서는 찬송할 하나님을 3 가지로 소개하였다.
찬송을 받으실 하나님, 다시 말하면 우리가 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가를 알려주며,
또 이단들이 아무리 땅 위에 가득하여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계시니 염려할 것이 없다는 믿음을 준다.
그리하여 거기에 필요한 역사를 뜻하는 세 가지의 하나님을 알려 주었다.

1) 능히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심

 능히 보호하사 : 여기 “너희” 는 부르심을 입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을 말한다 .

한번 부르신 자를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보호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 하시고 보호 하시지만 부르심을 입은 자를 특별히 사랑 하시거 보호하신다.
영육을 다 보호하시되 특히 영에 치중하신다.
그의 보호는 어떤 어려움에도 능하시며 그의 보호의 방법은 무한하시다.
그의 보호는 의로우시며 또한 영원에 이른다.

거침이 없게 : 이 말씀은 걸어가는 길에 거침이 없이 평탄하게 보호하신다는 뜻이다.
거침이 없다는 것은 특히 죄에 대하여 거침이 없게 하신다는 뜻이다.
걸어 가는 길에 관한 것으로 이는 생활 선상에서 거리끼는 죄를 제거하여 주신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는 외적 상태이며 인간의 자범죄를 짓지 않게 보호하신다는 말씀이다.

죄가 가득한 세상이므로 “거침이 없게” 라는 말은 죄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보호하신다는 것이다 .
심지어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게 보호하신다 (요일 5 : 18 ).
또한 다른 각도에서 보면 “거치게 될 일들을 없게 하신다” 는 의미도 없지 않다.

2) 영광 앞에 서게 하실 자


흠이 없게
 : 흠이라는 것은 사람 자체에 있는 것으로 이는 내적 상태이며 인간의 원죄를 뜻한다.
이 원죄를 없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인간에게는 자기가 죄를 범하는 자범죄와 조상으로부터 전해 내려오언 원죄가 있다.
자범죄는 외적이며 원죄는 내적이다.
그러므로 안과 밖을 다 깨끗게 보호하여 주신다는 것이다.
이는 자범죄와 원죄를 다 깨끗하게 하시고 다시 그 가운데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여 주신다는 말씀이다.
본서의 정신으로 볼 때 이단과 사설에 걸려들지 않게 하신다는 뜻이 있다.

영광 앞에
라 함은 “하나님 앞에” 라는 말이다.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실 일은 장차 이 세상 끝난 후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 하나님 앞에서 길이 살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위에서부터 살펴보면 우리를 보호하시고 거침이 없게 하시며 흠이 없게 하신 후에 영광 앞에 세우시는 순서로 되어있다.
과연 그렇다.
그의 보호가 없으시거나 거침과 흠이 있으면 영광 앞에 설 수가 없을 것이다.
즉 영원한 나라에 들어 갈 수가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사 그원을 이루게 하실 것이라” (히 12 : 14 ) 고 하였으며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 12 : 14 ) 고 하였다.
사도 요한은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구원의 찬양을 드리는 자들이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계 7 : 9 ) 라고 표현하였다.

이와 같이 영광 앞 곧 하나님 앞에 서게 될 자들은 거침이 없고 흠이 없어야 한다.

즐거움으로 하신다
 : 이는 성도들을 영광 앞에 서게 하시는 일을 부득히 하심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하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모든 것은 인간을 지으사 영광 앞에 세우시는 일을 중심으로 하셨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고전 3 : 22-23 ) 하였고.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고전 3 : 21 ) 고 하였다.

또 바울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실 때는 말씀으로 하셨으나 인간을 위하심에는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1 : 19 ) 고 하였다.
곧 인간을 영광 앞에 서게 하시는 일은 하나님께서도 크게 힘쓰는 일이라고 하였다.
실상 그럴 수 밖에 없으니 흙으로 지은 인간을 하나님과 영원히 같이 서게 하시는 데는 크게 힘써 하셨을 것이다.
베드로는 이 일을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라” (벧전 1 : 12 ) 고 하였다.

이같이 생명을 지어시고 사랑하사 보호하시며 거침과 흠이 없게 하사 그 영광 앞에 서게 하시는 일을
즐거움으로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3)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구주 : 곧 우리 구주라고 하였다.
이 “곧” 이라는 말은 위에 있는 말을 이어 받은 말이다.
위에 있는 말씀은 “능히 보호하사  거침과 흠이 없게 하시며 즐거움으로 그 영광 앞에 세우신다” 는 말씀이다.
이 말씀대로 인생을 인도 하시는 그 일이 구주 되신다는 것이다.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구주를 지나서 영세적이며 영광으로의 구주라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육체가 사는 동안 필요한 도움을 얼마 받다가 죽어버리는 그러한 구원의 구주가 아니라
금세에서 영원에 이르는 구원을 주시는 구주시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딤전 4 : 10 ) 이시다.
그리고 누가는  이같은 구원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행 4 : 12 ) 고 하는 베드로의 말을 소개하였다.

구세주는 땅에 없다. 인간 가운데는 없다.
인간은 누구나 죽으며 또 약하여 구원을 받아야 할 위치에 있다.
생과 사를 주장하여 금세와 내세를 주장할 존재자만이 인간의 완전한 구주의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이다.

홀로 하나이신 : 본 문장의 연결로 볼때 인간을 능히 보호하시고 거침과 흠이 없게 하시며 영광 앞에 서게 하실 구주는
하나님 홀로 한분 뿐이시라는 말씀이다.
하나님 외에 다른 존재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다만 삼위가 계셔 삼위 일체되신 한 하나님이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삼위가 일체되심이 한 사람에 있어서 마음과 말과 행위,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의 인격을 이룸과 흡사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창 1 : 26 ). 라고 하신 “우리” 라는 복수는
삼위 일체를 보임이며 그 형상과 모양으로 지은 인간들에게도 마음과 말과 행위의 세 부분에 있어 한 사람을 이루고 있다.
한 사람에게 마음과 말과 행위가 각각 다르게 있다고 해서 그를 세 사람으로 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예수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 10 : 30 ) 하셨고
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마 28 : 19 ) 라고 하시어
삼위가 일체되심을 보이셨다.
구주는 이 삼위 일체되신 하나님 곧 홀로 하나님이신 하나님뿐이시라는 말씀이다.

이상에서 찬송을 받으실 하나님에 대하여 말한 세 가지를 다시 세분하면 일곱가지로 말할 수 있다.
1, 능히 보호,
2, 거침 없게 하심,
3, 흠없게 하심,
4, 영광 앞에 세우심,
5, 즐거움으로 하심,
6, 우리 구주 되심,
7, 홀로 하나이심이다.

하나님을 찬양함에 있어
유다서 24 장으로는 세 가지로 (계 4 : 11 ),
천사들은 7 가지를 (계 5 : 12 )
만물들은 4 가지로 하였다 (계 5 : 13 ),
셋과 일곱은 하나님께 대한 수이며 4 은 만물에 대한 수 (동서남북) 이다.

[주] “흠”의 원어 “아모모스”는 특히 희생 제물의 뜻을 가진 낱말이다.
제물로 드리는 동물에 흠이나 결점이 있어서는 않된다.

2,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25절

25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찬송드리게 된다는 뜻이다.
이 말씀은 먼저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가 되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인간에게 내려올 때에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받게 되며 우리가 기도와 찬양을 하나님께 올릴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상달된다는 말씀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엡 1 : 2, 롬 1 : 7, 빌 1 : 2  ) 하였고
요한은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계 8 : 3-4 ) 고 하였다.
이는 성도의 기도가 제단곁의 금향로에 받은 향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좌 우편에서 드리는 기도와 합하여 하나님께 상달된다는 말씀이다.
예수께서도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요 14 : 13, 15 : 16 ),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요 16 : 23 ) 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과 기도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응답과 은혜가 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말씀이다.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도 없으니 예수 친히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2 : 6 ) 하였다.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라는 밀씀은 다음과 같은 귀한 뜻이 있다.
주는 예수 그리스도시요 우리는 그에게 속한 자들이다.
예수에 대하여 바울은 말하기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 2 : 6-11 ) 고 하였다.
이 말씀 가운데 예수께서  주가 되신 경로와 그를 주로 시인함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음을 본다.

요한은 예수가 주 되심에 대하여 “만주의 주” (계 17 : 14 ) 라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가 되신 그로 말미암아 또는 주가 되시기까지의 그 역사로 인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라는 뜻은 전술한 바와 같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마 1 : 21 ) 는 것이다.
그의 백성된 우리가 그로 인하여 죄에서 구원함을 얻었으니 예수로 말미암아 또는 예수라는 뜻을 이루신  그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찬양드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기름을 부었다는 뜻이며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을 세울때 기름을 부었다.
그는 우리의 선지자요 우리의 제사장이며 또 우리의 왕이시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또는 그리스도라는 3 가지 뜻을 이루시는 역사로써 하나님께 찬양 드리게 된다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 같이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과 기도 그리고 우리가 장차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이 모든 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3, 찬양    25 절  

25 :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1) 가사 

하나님께 대한 찬양 가사는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 이 네 가지로 되었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 찬양하는 것이다.
영광은 하나님 지체에서 발산되는 영화로운 빛이다.
본서에서 볼 때 가만히 들어온 잘못된 거짓 종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영광스러운 직분을 얻은 것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며 또 그들은 영광을 훼방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영광의 직분을 빼앗으려 고라처럼 패역한다.

사탄도 높은 영광을 얻고자 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자기의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처소를 떠났고
또 기어이 영광을 받아보려고 악한 계획으로 모세의 시체를 가지려다가 실패하였다.
그러나 천사장 미가엘은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주께 맡겼을 뿐이었다.
이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악용하거나 훼방하며 자기가 받으려고 하던 자들은 사탄과 이단으로써 멸망하였다.
그러나 바른 천사장 미가엘과 부르심을 입은 사랑하는 성도들은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 돌리게 된다.

그리고 우리를 능히 보호하시고 거침과 흠이 없게 하사 영광 앞에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홀로 하나이신
그 하나님의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은 너무나 지당한 일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받은 하늘의 계시에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계 4 : 10-11 ) 라고 알게 하였다.
여기서 면류관을 벗어 보좌 앞에 던진 것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진리로 승리한 그것이 오로지 하나님의 도우심이니
어찌 그 영광을 인간이 받을 수 있겠는가고 다시 승리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뜻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영광을 결단코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않으신다
이사야 선지자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사 42 : 8 ) 하였고
또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사 48 : 11 ) 고 기록하였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하는 자는 심판을 받는다.
옜날 웃시아왕은 좋은 왕이었다 (대하 26 : 1-5 ), 그러나 그가 강성함에 따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교만하여
영광스러운 제사장의 직권을 범하여 문둥병으로 죽었다 (대하 26 : 16-23, 사 6 : 1 ),
그리고 초대 교회때 헤롯왕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은 까닭에 주의 사자가 쳐서 충이 먹어 죽었다 (행 12 : 23 ).
실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축복받은 은혜를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고 자기가 그 영광을 도적질 하거나 또 악용한 때는
오직 심판이 있을 뿐이다. 두려운 일이다.

위엄은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엄격하신 위세 곧 공의로우신 속성에서 발생되는 엄하신 모습이다.

본서에서 살펴 보면 가만히 들어온 자들이 하나님의 위엄을 없신여겨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며
애굽에서 구원받은 주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위엄보다 아낙 자손 곧 인간들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고  사탄도 하나님의 위엄 앞에 감히 모세의 시체로 인한 싸움을 하였다.

가인과 발람과 고라도 하나님의 위엄을 찬양할 수 있었더라면 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들이 하나님의 권위를 없신여겼다고 유다는 말하였다.
그러나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천사장 미가엘과 에녹은 모두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조심하며 살았다.

또한 여기의 위엄은 우리를 능히 보호하시고 거침과 흠이 없게 하시며 그 영광 앞에서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의 위엄에 치중한다.
어느 누가 또 무엇이 그 위엄과 비길 수 있을 것인가 ?,
모든 위엄은 홀로 그의 것이니 그에게 위엄의 찬양을 돌려야 할 것이다.

권력은 하나님이 가지신 권세와 능력을 말한다. 즉 하나님이 가지신 힘이다.
가만히 들어온 자들인 무력한 인간이 권력자이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며
출애굽때 하나님의 권력을 친히 목격한 주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권력을 찬양하지 못하고 아낙 자손들의 장대함에 놀라고
하나님의 권위를 업신여겼다. 이같은 자들은 다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렇지만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하나님의 권력을 체험하여 아는 자들로서 오로지 하나님께 찬양을 돌린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는 능하심,
거침과 흠이 없게 하시는 그 신기한 힘,
즐거움으로 영원하신 영광 앞에 세워 주실 그 위대하시고 절대적인 힘을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을까 ?
우리는 그 권력을 그에게 찬양할 것이다.

권세
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권력은 하나님 안에 있는 힘이지만  권세는 하나님 안에 있는 권력이 외부 세계로 퍼져 가득하게 되는 권위의 세도이다.
본서에서 볼 때 가만히 들어온 자들은 하나님 은혜의 권세보다 색욕이라는 욕정의 권세 아래 굴복하여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꾼다.
애굽에서 나오면서 하나님의 권세를 눈으로 목도한 주의 백성들이 아낙 자손들의 장대한 권세를 더 드려워 하였고
가인과 발람과 고라는 하나님의 권세보다 인간들의 지위와 명예와 물질의 권세를 찬양하다가 화를 받았다.
저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를 비웃고 업신여겨 훼방하며 사람의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를 더 높이 평가하여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것을 얻으려고 싸우고 그것을 얻어 가지고 죄를 지으며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악을 한다.

그러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종된 사도들과 함께 오직 하나님께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를 찬양드린다.
이는 그들의 체험이요 산 지식이고 또 그들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2) 때

찬양 받으실 시기는 만고전, 이제, 세세라고 하였다. 과거, 현재, 미래를 뜻한다.

만고 전이라 함은 천지가 창조 되기 전 하나님이 계시던 무시(無時)의 때를 의미한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계셨다는 말씀이다.
이겻은 유다의 현 시점에서 과거와 미래를 내다보며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를 찬양할 것이다.
바울은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롬 11 : 36 ) 아라고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제로 주를 찬양하였다.

실은 만고 전부터 찬양을 받으신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으로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있게 하시며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로 명령을 거스리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었느니라” (잠 8 : 22-31 ) 고 밝혔다.

만세 전 상고부터 이미 나신 자가, 세우심을 입은 자가 그 앞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였으니 곧 인자가 하나님께 기쁨과 즐거움이 되셨다.
또 하나님 앞에 항상 있는 네 생물이 있다.
그들이 밤낮 쉬지않고 세세에 살아계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있다 (계 4 : 6-9 ).
그리고 만만이요 천천인 천사들의 찬양도 있다 (계 5 : 11-12 ).
천사들도 천지 창조 이전부터 존재하여 하나님의 부리신바 되었다.
이상과 같이 만고 전부터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를 뵈옵고 찬양하는 존재들이 있다.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까지 그대로 존재 하신다는 말씀이다.

유다가 있던 때와 1.900 여년이 지난 현재에 서서 생각해 본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능히 보호하사 거침과 흠이 없게 하여 즐거움으로 영광 앞에 서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복음운동이
유다 당시와 현재를 비교해 볼 때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드러남이 현저하다.
그때는 겨우 유대 안에 복음이 전파되었지만 지금은 복음이 온세계에 가득하다.
그의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살아 계심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당시로부터 지금까지 인간들의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기독교의 복음운동을 얼마나 핍박하며 탄압해 왔던가 ?.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는 날이 갈수록 더 힘있게 지구 위에 가득차고 있다.

세세
는 영원 미래까지를 의미한다.
금후 금세에서부터 저 영원한 때까지를 말한다.
아직은 전인류가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를 다 알지 못하여 찬양을 드리지 못하지만 장차는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이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고 모든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를 세세토록 돌리게 될 것이다 (빌 2 : 10-11 ).
하나님은 태초부터 현재나 세세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항상 그대로 계신다는 말씀이다 .

말세에 처한 우리 성도들은 인간의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에 위압되거나 미혹을 받지 말고 지극히 크시고 영원하시며
받드시 이기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 안에 살며 그에게 경배하고 순종하여
영광 앞에 서서 영원히 찬양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3) 맺음

맺는 말은 “아멘: 이다
이 말은 구약 원어인 히브리어로 동의 한다는 뜻이다.
곧 “진실로 그러합니다” 라는 말이다.
유다서 전부에 대한 “아멘”이요, 하나님께 찬양하는 내용에 대한 “아멘”이다
유가서의 마지막 결구가 찬송으로 벶은데 대하여 빠트릴 수 없는 진리가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 하신 목적이 하나님 자신이 인간으로부터 찬송을 받으려 하심과 또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같이 살면서 찬송하는 축복을 가지게 하는 일이다.
얼마나 크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계획인지 무한한 감사를 드릴 수 밖에 없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말하기를 성부께서 우리를 창세 전에 택하시고 예정하사 신령한 복을 주시고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여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심은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증거 하였고 (엡 1 : 3-6 ),
또 성자께서는 그의 피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게 하사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 이라고 하였다 ( 엡 1 : 7-12 )

그리고 성령께서는 인치시고 우리의 기업의 보증 되시머 그 얻어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 이라고 하였다 (엡 1 : 13-14 ).
즉 삼위께서 역사하시는 그 궁극 목적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시편 기자도 마지막 150 편에 시종 찬양으로 끝을 뱆었다.
곧 처음과 마지막에 “할렐루야” (여호와를 찬양하라) 로 시종하고 그 안에 열 한 차례나 찬양하라는 말이 거듭 되었다.

사도 요한은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 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계 14 : 1-5 ) 고 전하였다.

이는 이 세상이 다 지나고 저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구속 얻은 성도들이 찬양하게 될 것을 미리 보이심이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모든 계획은 그 궁극 목적이 하나님이 찬양을 길이 받으시며 구속받은 인간들이 영원히 그를 찬양하게 하심이다.

우리는 이단자와 이단에게 미혹받는 자가 되어 영원한 지옥에서 사탄과 함께 슬피 울며 이를 가는데 이를까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올바른 신앙으로 성경과 성령의 인도 아래 바른 성도가 되어야겠다.
그리하여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 그의 영광 앞에서 영원토록 새 노래를 부르는 자들이 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가만히 들어온자 곧 3 단체 (주의 백성, 처소를 떠난 천사, 소돔과 이웃 도시들 )와
3 개인 ( 가인, 발람, 고라 ) 같은 자들이 될까 두려워하며 또 그같은 자들에게 끌려 미혹 받는 자가 되지 말자.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가 되어 미가엘과 에녹과 서도들의 일과 말을 기억하여 먼저 자기를 반성하고 다음에 다른 이를 도와
하나님께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를 찬양드리는 축복 있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독자들에게 더욱 많을 것을 믿고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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