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서 제 2 부
제 2 편 목적
문안(1,2)에서 발신자와 수신자의 축복이라는 세 가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문안을 마친 다음에 이 유다서를 쓰게 되는 이유 즉 이 편지의 목적을 제시 한 것이다.
성경의 편지 뿐만 아니라 동서 고금의 모든 사람들의 편지 에도 처음에는 먼저 문안을 쓰고
이어 편지를 쓰게 되는 목적을 제시 하여 왔다.
신약 성경의 편지체로 된 모든 서간의 첫부분도 그러하다.
유다서의 목적을 처음에는 일반으로 얻은 구원에 관하여 쓰려고 하다가 부득히 단번에 주신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것으로 바꾸었고 그 이유를 밝혔다.
1 첫번째 목적
3절,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사랑하는 자들아는 수신자 곧 부르심을 입은 자들을 향하여 한 말이다.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지키심을 입은 전부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다.
사랑 할 수 밖에 없다.
신자는 원수까지 사랑 하지만 진리의 자녀들을 더욱 사랑 한다.
일반으로 얻은 구원은 유다가 처음에 유다서를 쓰려던 목적이었다.
구원에 관한 진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 얻는 도를 말함인데
신약 성경 중에 4 복음,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에 기록 되어 있다.
즉 죄를 회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음으로써 사유함을 얻어 구원에 이른다는 진리이다.
예수라는 이름 뜻대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 하시는 진리이며,
그리스도라는 뜻과 같이 예수 초림 하셔서 선지자 되시고,
돌아 가신 때부터 재림까지 제사장이 되시며,
재림 하시어 만왕의 왕되심으로 인류를 구원 하시는 진리이다.
이같은 진리를 구원의 도라고 한다
일반으로 얻은 구원에 대하여 2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유대인이나 일반인이나 다 일반으로 구원 얻는다는 뜻이다
바울은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 : 24 ) 라고 하였다.
또한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골 3 : 11 )고 하였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다 일반으로 같이 얻는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아브라함의 자손만 구원을 얻고 이방인들은 구원에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하나님의 선민 곧 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만 구원을 얻고 이방인은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온 인류를 한 혈통으로 만드시고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신다 (행 17 : 25-26 ).
하늘과 땅의 모든 족속들에게 아버지가 되시며 (엡 3 : 14-15 ),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 (딤전 2 : 4 ).
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 : 16 )고 증거 하였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자기를 속전으로 주셨다고 하였으며 (딤전 2 : 6 ),
예수 친히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왔다고 하셨다 ( 막 10 : 45 ).
사도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로에게 전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고넬로에게 이상을 보이시고
베드로에게는 하나님께서 깨끗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라고 말씀 하셨다 (행 10 : 15 )
그일로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각 나라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을 깨달았다 (행 10 : 34-35 ).
하나님께서 바울에 대하여
”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행 9 : 15 )고 하셨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문제로 큰 변론이 있은 후 예류실렘 공의회에서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 (행 15 : 7-9 )고 하였다.
공의회 의장 야고보는 구약에서 이방인이 구원에 들어 얼 것이라는 예언 (암 9 : 11-12 )을 들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함은 마땅하다는 결정을 내렸었다 (행 15 : 15-18, 19-29 ).
후일 베드로가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벧후 1 : 1 )
편지한 것이 베드로 후서이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가 구원을 일반으로 얻게 하심을 여러 종들을 통하여 말씀 하시고 또 친히 역사 하신다.
누구든지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이는 성경의 일반론이다,
예정론은 이에 대한 더 깊은 진리이다.
둘째, 일반으로 얻은 구원이란 말은 이단과 같이 잘 못된 구원이 아니라
유다와 같은 바른 믿음의 계열에서 동일한 믿음을 얻은 구원에 대하여 쓰려고 했다는 말이다.
2, 변경된 목적
3절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것이 변경된 목적이다.
이 “단번”이라는 진리를 자세히 알아야 한다.
단번에 주신 도는 예수께서 십자가 의에서 속죄의 죽으심으로 이루신 십자가의 도를 말한다.
온 인류의 속죄를 자주 여러번 죽어 주심으로 하지 않고 단번에 완성 하셨다는 말씀이다 .
속죄의 제사를 단 한번으로 다 이루어 두셨으니 누구든지 어느 때든지 회개하고 믿으면 사죄를 얻게 되는 도이다.
또한, 유다가 단번에 주신 도를 위해 힘써 싸우라는 목적을 변경 한 것은
예수 속죄의 죽으심을 믿지 아니하는 이단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가만히 들어온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는 죄를 범하며
홀로 하나이심 주재 곧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 했기 때문이었다.
속죄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 했기 때문 이었다.
십자가에 죽어심은 단번 뿐이다.
옜날 제사장 들은 먼저 자기 죄를 위하여, 다음에는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를 지내야 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었다 (히 7 : 27 ),
단번에 죄를 없게 하셨고 (히 9 : 26 , 10 :10)
단번에 하늘 성소에 들어 가셨다 (히 9 : 12 ).
십자가는 단번 뿐이기 때문에 중대한 문제점이 있다.
만일 어느 사람이 십자가의 은혜를 얻은 후에 다시 범죄 하면 두번 십자가가 없으므로
다시 구원 얻을 길이 없고 오직 심판이 있을 따름 이라는 것이다.
범죄 할 때마다 자주 십자가를 져주시면 용서가 될 것이다.
그러나 담번 뿐이니 문제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히 6 : 4-6 ) 하였다.
여기에서 다시 십자가에 목 박는다는 말은 다시 십자가가 없다는 것이니 멸망만 남아 있다는 것을 강조한 문장이다.
본서에서 가만히 들어온 자들에 대하여 유다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기록 된자” (4) 라고 하였다
주의 백성도 에굽에서 구원 얻음을 친히 맛보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합으로 멸망 시켰으며 (5)
하나님을 모신 천사가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처소를 떠날 때 어두운 가운데 가두사 큰날의 심판을 기다리게 하셨다.
저들은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12 ),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 갈 유리하는 별들 이라고 하였다 (13 ).
가인과 발람과 고라도 다 하나님을 이미 알고 맛본 자들로서 타락한 자들이었다.
이와 같이 한번 은혜를 받은 자들이 타락하면 두번 십자가가 없으므로 멸망 뿐이다.
그러므로 유다는 한번만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권면으로 이 글을 쓰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에 대한 풀이를 여기서 중단 한다면 우리는 근심하고 두려워 할 것이다
왜냐하면 믿은 후에 전혀 범죄하지 않았다고 할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이 문제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 하기로 하겠다.
신자에게 불사죄가 3 가지 있다.
성부에 대한 영광 훼방 (출 20 : 3-7, 사 42 : 8, 48 : 10, 행 12 : 21-23 )과
성자에 대한 배도 ( 히 6 : 4-6 )와
성령에 대한 훼방 (마 12 : 31-32 ) 이다.
성부에 대한 영광 훼방은 자기가 하나님의 은혜로 교계에 알려져 지위가 햘상될 무렵
끝까지 겸손 하여 두렵고 떪으로 순종하는 종이 되지 않고 자기의 명예와 지위를 악용하여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자기가 받는 것을 말한다.
그들은 영광 있는자를 훼방하여 ( 8 ) 두려움 없이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12 )
공중에 높이 떠있는 물없는 구름 (12 ) 이다.
말세에 가증한 물건도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하다가 때가 이르면 멸망 할 것이다 (살후 2 : )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하는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었다 (행 12 : 23 ).
성자에 대한 배도는 한번 은혜를 맛본 자들이 다시 범죄함을 말한다.
토하였던 것을 다시 먹는 개와 씻었다가 다시 더러운데 눕는 돼지 같은 자들이다 (히 6 : 4-6, 벧후 2 : 22 ).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성령으로 진리를 말하고 능력과 기사를 행하는 자를 미쳤다고 하거나
사귀 들렸다 (마 12 : 31-32 ) 고 하는 죄이다.
물론 말세에 악령으로 기사와 이적과 예언하는 거짓 선지자들과 스승이 많지만 진실로 성령으로 된 종들도 있다.
여기서는 성령으로 된 자들을 사귀 들렸다고 악평함을 뜻한다.
그러면 신자들이 삼위에 대한 과오가 전혀 없을 것인가 ? 다음을 참고하자.
죄에는 정도가 있다.
정도에 따라 죄는 죄로되 죽는데 이르는 죄도 있고, 죽지 아니하는데 이르는 죄도 있다 (요일 5 : 16-17 ).
죄의 정도에 3 가지가 있다.
곧 부지 중에 짓는 죄,
알고도 약하여 짓는죄,
알고도 잠짓 고의로 짓는죄이다.
곧 부지 중에 짓는 죄와 알고도 약하여 짓는 죄는 죽는데 이르는 불사죄가 아니다.
회개를 이루어 구원에 이른다.
부지 중에 짓는 죄는 성령의 감동으로 깨닫는 순간 책망을 받아 회개한다.
하나님께서 깨달을 수 있게 책망과 권고로 회개의 기회를 주신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 :34 ) 라고 기도 하셨다.
부지 중에 짓는 죄는 마치 어린 아이가 죄의식 없이 부모에게 과오를 범함과 같다.
부모들도 그 어린아이의 죄를 용서 할 것이며 아이도 자라서 그것이 죄인줄 알 때 고칠 것이고 용서를 빌것이다.
욥도 “어렸을 때에 지은 죄를 계산 하시느냐” (욥 13 : 26 ) 고 했으며
다윗도 “내 젊을 때의 저ㅣ를 기억지 마시라” (시 25 : 7 ) 고 하였다.
알고도 약하여 지은 죄는 어떤 때는 그 일을 해서는 안될 것을 알아 힘써 그 시험을 이기려고 노력 하였지만
약하여 실수로 범하는 죄이다.
이같이 죄인줄 알면서 지은 죄이기 때문에 불사죄라고 오해하는 일이 많다.
신자 거의가 이와 같은 두려움에 빠져있다
그러나 이 죄는 약하여 지은 죄로 얼마 후에 성령의 감동으로 회개하게 되여 용서를 얻는다.
예를들면 사도까지 된 베드로가 주를 부인하고 저주 까지 한일 (마 26 : 69-75 )
환도를 쓰던일 (마 26 : 51-52 ),
옛날로 돌아가 디베랴 바다에서 고기를 잡았던 일들이다.
이런 일들은 그의 인간의 연약에서 지은 과오 였다.
절대로 주를 미워하여 배반 하거나 다른 야욕이 있어서가 아닌 단순한 연약 이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다시 찾아오셔서 베드로에게 세번이나 “사랑 하느냐”를 반문 하시고
각성과 확실함을 촉구하시며 계속 사명을 맡기셨던 것이다 (요 21 : 12-23 ).
그때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 하시기를 “네가 젊어서는 임의로 다녔다”고 하셨다.
이는 나이가 어리다는 뜻이 아니요, 믿음이 어렸다는 말씀이었다.
이같이 연약하여 알면서도 실수 한 일은 신약과 구약에 무수하다.
짐짓 짓는 죄는 불사죄이니 회개가 되어지지 않는다.
이단자 곧 가만이 들어온 자들이 짓는 죄이다.
두려움이 없고 양심이 단쇠에 화인 맞아 (딤전 4 : 1-2 ) 살과 같은 부드러운 마음이 없고 강팍하다.
죄를 짓지 아니하면 단잠이 오지 않고 죄의 방법으로 얻은 지위와 명예와 재물로 영광을 삼고
거만 무례하여 회개의 빛이 전혀 없다.
부끄러운 찌꺼기를 내어 뿜는 바다의 미친 물결같이 출렁된다.
때로 자기 죄가 생각 되어도 회개 하지 않지만 회개가 되어 지지도 않는다.
불행한 존재이다.
이같은 죄에 3 가지 정도가 있다.
다시 말하거니와 부지중에 지은 죄는 깨닫는 즉시 회개가 되어지며
알고도 약하여 지은 죄는 오랜 후에 회개 되어 용서 되지만,
고의로 짓는 죄는 영원히 회개가 되어지지 않는다.
불사죄는 이 고의 범죄자들의 죄를 말한다.
아직 믿지 않는 자들과 믿되 부지중에 약하여 죄를 지은 자들은 어린 자들이니
어떤 죄라도 불사죄는 아니지만 그저 구원 얻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죄를 회개 하고 믿음으로 사죄를 얻어 구원에 이른다.
범죄 후 권고의 역사가 항상 있다.
그러나 크게 세번 기회가 있다
첫번은 범죄 직후 인데 범죄자의 중심에 강력한 가책으로 역사 하신다.
이 때에 회개 하여 평안함을 얻지 못하면 두번째는 병상에 누웠을 때 다시 반성과 죄의식에 가책을 받는다.
이 때에도 회개가 없을 때에는 세번째 임종 직전 비몽 사몽 간에 가책을 받는다.
이와 같이 첫번에 회개한 사람은 두번째와 세번째에는 아무 가책이 없다.
첫번에 회개 하기 않은 자들은 두번쩨에, 두번째 회개 하지 않은 자들은 세번째 기회에,
그 때에도 회개가 되어지지 않은 자들은 심판이 있을 뿐이며 이것이 이단자의 종말이다.
밤죄자들의 형태도 여러가지 형으로 나타난다.
사탄형,
유다형,
에서형,
야곱형으로 나눌 수 있다.
사탄형에 대하여 알아보자.
사탄은 근본 하나님 앞에 있던 자이나 범죄 한으로 하늘에서 공중으로 쫓겨 났다 (엡 2 : 1, 유 6 :, 계 12 : ).
그러나 회개 하지 않고 하나님을 거스려 땅으로 (계 12 : ),
땅에서도 회개 하지않고 거스리다가 무저갱으로 (계 20 : 1-3 ),
또 무저갱에서 풀려 나온 후 다시 거스려 싸우다가 영원한 불에 던지 운다 (계 20 : 7-10 )
이 사탄은 징치릏 계속 받으면서도 띁까지 반항 하며 회개 하지 않다가 멸망한다.
이 처럼 어떤 범좌자는 여러가지 어려운 징치를 당하면서도 끝까지 회개 하지않고
원망과 핑계와 반항으로 대적하는 사탄형이 있다
유다형이 있는데 이런 형의 범죄자는 유다와 같이 스스로 체념하여 자결한다.
스스로 구원 받을 일에 낙망 하여 단념한다
이는 유다형이다 ( 마 27 : 1-5, 행 1 : 17-18 ).
에서형은 범죄 후 에서와 같이 눈물로 간구 하지만 버린 바가 되어 고칠 기회 곧 회개 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히 12 : 16-17 )
어떤 신도들도 항상 회개하는 마음으로 애통하고 눈물로 간구 하지만 고쳐 지지 않는 자들이 많다.
이 같은 사람이 바로 에서형이다.
야곱형은 회개 하여 구원 얻은 형태의 범죄자를 뜻한다.
야곱이 압복강변에서 회개를 이루어 이스라엘 이라는 새 이름을 얻고 다시 간사한 도적 같은 것이나
범죄함이 없이 여생을 보녔다 (창 32 : )
이런 사람들은 철저히 회개하여 새 생활에 나아간다
위와 같이 현대 교회애도 끝까지 회개 하지 않고 반발하는 사탄형과 자기 스스로 구원을 체념하는 유다형,
그리고 항상 울며 눈물로 기도와 찬송을 하면서도 회개가 되어지지 않으며 생활에 변화가 없는 에서형이 많다.
그러나 자기죄를 통철히 회개하고 다시 죄가운데 빠지지 않는 야곱형도 있다.
이 야곱형 외에 다른 3 가지형은 모두 멸망을 받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기 바란다.
버린바 되지 않았으면 회개가 되어 질것이다.
또한 단번만 주신 도라는 말씀은 단번으로 완성하신 십자가의 도가 언제든지 항상 열려 있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자가 언제든지 그 십자가 앞에 나아가 회개하고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게 된다.
회개가 되어 진다는 것은 큰축복이다.
이러한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고 유다는 말한다.
이는 십자가의 도 곧 십자가는 단번 만의 도이므로 이단과 힘써 싸우라고 한다.
자신이 이단자가 되지 않고 또한 다른 이단자에게 미혹을 받지 아니하기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것이다.
만일 은혜를 얻은 후 다시 타락하면,다시 말하여 배도하면
두번 십자가가 없는 한 구원 얻을 길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투쟁의 종교이다.
본서에서 힘써 싸우라고 함은 이단에 대하여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싸우라 한다.
즉 믿음의 싸움이다.
바울은 신자에게 싸움이 있다고 하였고 (빌 1 : 30 )
믿음의 사람들을 군사라고 하였다 (발 2 : 25, 몬 2 :, 딤후 2 : 3-4, 고전 9 : 7 ).
이 군사들의 무장은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한 힘이라고 하였다. (고후 10 : 4 ).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고후 6 : 7 )라 하였으며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글 가운데는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구원과 소망의 투구를 쓰자고 하였다. (살전 5 : 88 )
에베소 교회에게는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 ( 엡 6 : 11-12 ).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엡 6 : 14-18 ) 라고 하였다.
또한 로마 교회 신자들에게는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롬 6 : 13 ) 고 하였다.
그리고 이 싸움은 선한 싸움이어야 한다 (딤전 1 : 18, 6 : 12 ).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엡 6 : 12 ).
곧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싸움이다 (롬 12 : 21 )
다시 말하면 원수가 주릴 때 먹이고 목 마를 때 마시게 함으로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음 같은 일이다 (롬 12 : 20 ).
오른편 빰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 까지도 가지게 하며,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믿음의 싸움이다 (마 5 : 38-48 ).
참 믿음의 사람들은 구약시대와 신약시대 그리고 초대교회로 부터 지금까지 위와 같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였다.
선지자들과 사도들과 성도들이 혈기와 중상 모략과 법정투쟁과 무근지설 날조로 허위 선전을 하면서
사나운 눈과 사나운 얼굴과 독한 말로 싸우는 성도는 한 사람도 없었다.
예수를 죽인 유대 종교가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승리 하였다고 축배를 들 때,
예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고통 중의 십자가 위에서 사죄 기도를 드리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심으로 다 이루었다 (요 19 : 30 )는 승전가를 부르셨던 것이다 (골 2 : 15 ).
이단자들은 다른 이를 망하게 하면서 이겼다고 축배를 들지만,
참 믿음의 사람들은 죽임을 달하면서 그들을 용서와 축복 함으로 이긴다.
이것이 선한 싸움, 믿음의 싸움이다.
가시 밭에 핀 백합화의 생리이다 (아 2 : 2 ).
이 믿음의 싸움은 지고 이기는 싸움 곧 현재에서 지고 미래에서 이기는 싸움이요 반드시 이기는 싸움이다.
다만 이단자들에 대하여는 사도 요한의 말을 기억할 것이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 ” (요이 10-11 ).
이 선한 싸움에 이겨야 할 몇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기를 이겨야 한다.
바울은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롬 7 : 22-23 ),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싸운다” (갈 5 : 17 ) 고 하였다.
믿음을 얻어 부르심을 입은자 곧 그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신자들은
중생한 새 생명이 중생 되기 정의 자기는 육체의 소욕에 속한 자여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 (갈 5 : 19-21 ) 에게 잡혀 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그 육체와 싸워 이기어 자기를 사로 잡아 하나님께 복종 시킨다.
예수께서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자주 들려 주신 말씀중에
자기를 이기고 따르라 하셨다 (마 16 : 24,막 8 :34, 10 : 29, 눅 9 : 23, 14 : 25-35, 요 12 : 25 ).
참으로 세계를 정복 하기 보다 자기를 정복하는 일이 더 중요한 일이다.
둘째는 세상을 이겨야 한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 : 4 )고 하였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요 (마 12 : 39, 16 : 4, 막 8 : 11, 눅 11 : 29-32 ),
음란하며 (사 57 : 3, 마 12 : 39, 막 8 : 38, 약 4 : 4 ),
패역하고 (마 8 : 38 ),
사특하여 (행 2 : 40 ),
죄가 많은 세대이다 (막 8 : 38 ).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 믿음의 힘이 없이는 이길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로서 중생된 자만이 이긴다.
세째로, 마귀를 이겨야 한다.
마귀의 체계를 대적하고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 싸운다 (엡 6 : 11-12 ).
이 악령들은 근본 하늘에서 쫓겨 공중 권세를 잡고 불순종 아들들 가운데 역사한다. (엡 2 : 2 ).
그러다가 대환난 때는 지상에서 싸우고 (계 12 :, 13 : ),
천년왕국 후에는 곡과 마곡 전쟁에서 최후로 싸운다 (계 20 : 7-10 ),
또한 개인 성도와 싸우고 (계 12 : 17 ),
모세 시체를 위하여 싸웠다 ( 유 9 ).
악령의 투쟁 방법은 언제나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주 무기를 삼는다.
아담 때와 (창 3 : 6 ),
예수에게 (마 4 : 1-11 )
그리도 지금도 (요일 2 : 16 ) 마찬가지이다.
신자들은 자기와 세상과 마귀와 싸워 이겨야 한다.
바울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 4 : 7-8 )고 하였다.
오늘날 교회는 어떻게 싸우고 있는가 ?.
또 믿음의 싸움에 생명을 바쳐 싸우는가 ?.
인간들의 사상을 위한 자들의 싸움에 비하여
우리는 생명과 재산과 시간을 얼마 만큼 바쳐 싸우는가 ?.
반성과 각오가 있어야 할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 정병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부모 형제 처자를 뒤에 두고
십자가를 지고 따를 때 승산의 예산이 있는 싸움이라도 언명 하셨다 (눅 14 : 25-31 ).
보라, 인류를 완전히 구원할 이 믿음의 도가 불완전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그것보다 얼마나 완전한 구원인가 ?.
우리는 이 복음 운동에 생사를 다해야 할 것이다.
[주] 3 절에서 믿음의 도를 “힘써 싸우라”는 말은 “에파고니제스싸이”인데
이 말속에 “번민” 이라는 말 “아고니”가 대포 되었다고 한다.
믿음의 싸움에 많은 괴로움과 희생이 있다.
그러나 죽기 까지 그 직무에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뜻이다
3, 목적 변경 이유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1)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
“가만히 들어온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유다가 목적을 변경 하였다.
곧 이단자를 말함이다.
이는 본서 중의 이단에 대한 표제이며 전 성경의 이단에 대한 중심이다.
가만히 들어온 사람은 자기 정체를 숨기고 얌전한 모양으로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자를 말한다.
양의 옷을 입고 교회에 나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요 (마 7 : 15 ),
회칠한 무덤 같이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한 자이며 (마 23 : 27 ),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겉만 보고는 사람이 알지 못한다.
이미 들어와 있는 자들이다.
예컨데 어떤 사람이 남의 집대문에서 자기 성명을 숨기고 가만히 그 집에 들어간 자가 있다면 그는 도적일 것이다.
이같이 가만히 들어온 자들은 교회와 단체 안에 들어와
재리와 명리 기타 자기들의 육에 속한 목적을 위하여 싸우며 도적질 한다.
가만히 들어온 자들은 정문으로 유유히 들어오지 못하고 담을 넘어 들어온다 ( 요 10 : 1 )
하나님의 교회 안에 3 정문이 있다.
첫째문은 회개의 문,
둘째문은 복음을 믿는 믿음의문,
마지막 세째문이 구원의 문 곧 천국의 문이다.
이로 볼때 가만히 들어온 자들은 첫째 정문인 회개의 문을 통과 하지 않고 담을 넘어 온 격이다.
자가들의 모든 죄를 숨기고 믿으면서 신자와 지도자의 옷을 입고 있다.
자기들의 정체를 알리지 않고 가만히 있다.
“나는 죄인 이로소이다” 하는 자기 고백이 없이 가만히 있다.
그들은 이단이요 도적이며 가만히 들어온 사람이다.
물론 이단자 아닌 처음 교회에 나온 초신자 들에게서 이러한 경우가 있지만
이단자는 지도자급의 이같은 자들이 가만히 들어온 자들이다. (히 6 : 4-6 ).
그들이 본서에서 말한 구약시대의 3 단체 (5-10 )와 3 개인 (11-16) 이며
사도들이 예언한 기롱하는 무리이며 (17-19 ), 그들이 애찬의 암초 (12 ) 이다.
위선과 기만의 사람 일수록 경건과 거룩과 친절로 가장 한다.
이단자 곧 가만히 들어온 자들이 배우의 분장과 기교에 능하여 택한 자라도 유혹 한다.
교회와 단체를 장사 하는곳 또는 강도의 굴혈을 만든다.
얼핏 보기엔 회칠한 흰빛이요 양의 옷을 입어 참 종으로 보인다.
흰빛은 대략 150 여 종이 있다. 그러나 참 흰빛은 하나 뿐이라 한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얼핏 보기에는 다 희다.
그러나 참 믿음의 사람 곧 진정으로 회개하여 사죄의 확증을 지닌 자들이 심히 적다.
참 흰 신자는 몇이나 될까 ?.
참 흰빛이 150 여 빛 중의 하나라면 흰 것 비슷한 자들이 149 인 꼴이 된다.
실로 놀라운 일이다. 두려운 것은 어느 때나 같은 비율이다.
참이 적고 거짓이 많다.
또한 가만히 둘어온 자들은 마치 황새와 같다 (레 11 : 19 ).
긴목을 높이며 창공을 향하여 눈을 감고 있을 때는 하늘의 높은 명상에라도 잠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은 썩은 개구리 주어 먹기에 여념이 없다.
현대 교계의 많은 신자와 지도자들 가운데 어떤 자들이 억지로 경건을 꾸미지만
세상의 썩을 욕망과 정욕을 채우려는 것 밖에 다른 여념이 없다.
베드로는 민간에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음같이
거짓 선생들이 일어나 멸앙 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 들일 것이라고 하였다 (벧후 2 : 1 ).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들 중에 가만히 들어온 형제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그들을 종으로 삼고자 함이라 하였다 (갈 2 : 4 ).
“가만히”라는 말 자체부터 어둡고 음모 간계가 숨어 있는 그늘진 말이다.
옛날 예수께온 동방 박사들을 헤롯왕이 가만히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물었으니
이는 예수를 잡아 죽일 음모를 품움이었다. (마 2 : 7 )
다시 말 하거니와 가만히 들어온 자는 회개 하지 않는 지도자들이다.
그리고 가만히 들어온 자들이 몇이 있다고 하였다.
이는 본서 수신자들의 모임 가운데 이단자들 몇 사람이 이미 들어와 있다는 말이다.
그 당시 가장 드러난 이단자들이 몇이 있었다.
그 중에 예수의 삼위 일체 되신 신성 또는 가현론자들의 예수의 인성을 부인 하며
영혼과 육체를 분리 시켜 죄를 인정 하지 않음으로 속죄의 필요를 부인하는 구노시스파가 있었다.
그리고 자기 들을 가장 지성인으로 자처하여 일반 신자들 보다 뛰어났다고 하면서
성경 신앙을 지식으로 잘못 해석 하며 그대로 사는 니골라당이 있었다.
이같은 종류의 이단들이 본서 수신자들의 모임에 몇이 들어와서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제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또 부인케 하였다.
[주]”가만히 들어온 것”의 원어 “파레이스도우세인”은 재판관과 배심원의 마음 속으로
점차 스며 들어 가게 하는 간교한 변호사의 가면족 유혹적인 말에 대하여 쓰이는 말이고
또 추방 되었던 자기 나라에 몰래 들어가는 불법자에 대하여 사용하는 말이며,
또한 국민의 생활을 개혁 한다는 미명아래 서서히 침투하여 결국 조상들이 전해준 법을
와해 시켜 버리는데 쓰였다고 한다.
2) 불경건한 저희들
이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자”들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구원 하실자에 대한 예정과 택하시고 부르심에 대한 상대적인 말씀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예정에 대하여
창세 전의 예정 (엡 1 : 4 ),
영원한 때 전의 부르심 (딤후 1 : 9 ),
복중에 짓기 전에 아시고 구별하심 (렘 1 : 5 ),
복중에서 택하심 (갈 1 : 15, 사 13 : 2, 눅 1 : 15 ),
태에서 나옴으로 부터 부르심 (사 49 : 1 )을 말씀 하셨다.
사도행전 기자는 하나님께서 다웟을 만나니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사람 (행 13 : 22 ) 이라 하여
다윗이 태어난 후에 그를 택하신 것으로 밀하였으며 (물론 만세전 예정이면서),
바울은 택하신 주의 그릇이라고 (행 9 : 15 ) 말씀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 8 : 29-30 )고 하였다.
본서에서도 문안에 있어서 스신자를 부르심을 입은 자라고 하여 수동형으로 표현 하였다.
하나님의 예정 안에 있던 자들을 부르신 것이다.
이와 마찬 가지로 가만히 들어온 자들도 옛적 부터 판결을 받기로 기록된 자들이라 하였다.
여기 “판결”이라는 말은 심판의 멸망을 뜻하며,
“미리 기록된”이라고 함은 하나님 백보좌 앞에 있는두 권의 책에 기록한 것같은 기록을 말한다.
이들은 생명책에 기록 되지 못한 다른 책에 기록된 자들이다.
기록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기록이 없다는 말은 기억이 없음을 말하고,
기억의 사실이 없다함은 기억하며 지, 정, 의,를 구유하신 인격적인 하나님이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절대자가 아닌 인간들의 책에 기록한 문자는 오래 기억 하기 위한 하나의 표식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책에 기록 하실 수도 있지만 인간과 같은 기록이 없어도
영원히 아시는 그 아심이 바로 기록이 되기도 한다.
사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하여 기록 하신 일이 없지도 않다.
옛날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돌에 기록 하여 주셨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가 있으라
너로 그들을 가르치려고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 하였고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 (출 31 : 18 )고 하였다.
또 “모세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오는데 증거의 두 판이 그 손에 있고 그 판의 양면 이편 저편에 글자가 있으니
그 판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요 글자는 하나님이 쓰셔서 판에 새기신 것이더라 ” (출 32 : 15-16 ) 하여
돌판이 두개요 하나님이 친히 만들어 쓰시고 새기신 일을 말하였다.
뿐만 아니라 바벨론 나라 벨사왕 왕궁 촛대 밪은편 분벽에 손가락이 나타나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단 5 : 25 )이라는 글자를 쓴 일도 있었다.
기원 313 년경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전쟁에 나갈 때 청천 백일 맑은 하늘에 불십자가가 나타났고
그 아래 라틴 말로 “엔 투토 니케”라는 글자가 나타난 것을 보고 그는 땅에 무릎 꿇어
“예수여 항복 합니다” 라고 부르 짓은 후 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같이 돌판에도,
바람벽에도,
하늘에도 자유로이 사람의 글자를 쓰신다.
기록이란 것은 알게 하는 표식이다.
아는 그 인식이 기록 이상의 기록이 될 수도 있다.
또한 요한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계 2 : 17 ) 하였다.
바울은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고후 3 : 2-3 )
하여 기록의 판과 먹을 신령하게 표현 하였다.
바울은 자기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진다고 하였으며 (갈 6 : 17 ),
마음과 이마에도 하나님의 이름인 인을 치시기도 한다 (계 1 : 13, 7 : 3 ) 고 하였다.
위의 모든 말들은 알게 하는 표식에 대한 말들이다.
하나님이 주신 계시록 중에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계 5 : 1 ) 하였고
또 “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의 손에 펴놓인 책을 가지라 하기로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같이 달리라” (계 10 : 8-9 ) 하여 요한이 그 책을 먹었다.
후에 “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계 10 : 11 ) 고 하였다.
인간은 보고 읽으며,
귀로 소리를 들으며,
몸으로 부딧쳐 감각하고,
마음의 생각으로,
그리고 코의 냄새로 모든 일들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여러 방법으로 인간에게 알게 하시는 표식 곧 게시를 주셔서 보게 하시고 듣게 하여 알게 하신다.
그러므로 여기의 “기록” 이라는 낱말의 근본 뜻을 파악 하여 하나님의 기록에는
여러 방법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 히 1 : 1-2 ).
옛적 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라는 말씀은
사람 마다 옛적 부터 미리 구원을 얻은 자와 얻지 못할 자를 미리 정하여 기록해 두었다는 뜻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가만히 들어와서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제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그 일 자체가 옛적 부터 판결 받기로 미리 기록된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 같이 된 자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뜻이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미리 기록하신 일에는 사람에 대하여 또는 사건에 대한 것의 두 가지가 있다.
“경건치 아니 하여 우리 하나님 은혜를 도리어 섹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제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 는 가만히 들어온 자들의 본질과 본능에서 행해지는 생태를 설명 함이다.
이 말씀을 구체적으로 알아야 한다.
경건은 그리스도의 영이 그 속에 있는 정통 신앙가들의 당연한 본질과 본늘에 의한 생태이다(롬 8 : 9 ).
불경건은 성령은 없고 육에 속한 자들의 본질적 생태이다.
올바른 신자는 어려움이 있고 핍박을 받아도 경건 하지만 (딤후 4 : 12 ),
가만히 들어온 자들은 경건한 모양을 억지로 가장 하여도 능이 없다 (딤후 3 : 4 ).
참 경건에 대하여 야고보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약 1 : 27 ) 하였다.
경건치 아니한 자들은 고아와 과부를 멸시하며 오히려 과부의 가산을 삼킨다.
본서에서 가만히 들어온 자들은
불경건한 마음,
불경건한 말,
불경건한 행동을 한다고 하였다 (14 ).
사도들도 말세에 불경건한 자들이 있을 것을 예언 하였다 (벧후 3 : 3 ).
경건은 하나님과 영에 속하고 불경건은 사탄과 육에 속한다.
성도들의 인내에는 경건을 더하여야 하지만 경건에는 형제 우애를 더하여야 한다.
즉 인내는 경건성이 결핍되기 싑고 또 경건을 잘못하면 굳어 유화됨이 결여되기 쉽기 때문이다 (벧후 1 : 6-7 ).
그러나, 불경건한 자들은 인내도, 경건도, 형제 우애도 있을 수가 없다.
그리스도는 경건의 비밀이며 그 본체이시다.
그러므로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딤전 3 : 16 ) 하였다.
어떤자들은 경건을 이익의 수단으로 생각하여 꾸미지만 (딤전 6 : 5 ),
그 실은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도 있음이 사실이다 (딤전 6 : 6 ).
우리는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여야 한다 (딤전 4 : 7 ).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되기 때문이다 (딤전 3 : 8 ).
그리고 경건한 자는 주께서 시험에서 건져 주시고 불의한자 곧 불경건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날 까지 지키신다.
우리는 뫂은 자세나 신령한 척 경건한 모양을 꾸미는 외식 곧 회칠한 무덤과
평토장한 무덤 같은 양의 옷을 입은 이리가 되지 말자.
진실한 경건을 지니려면 가만히 들어온 자거 되지 말고 정작한 회개와 건전한 믿음을 성경에 근거하여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짐을 얻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꾼다” 는 말은 가만히 들어온 자들의 본질을 표현한 말이다.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그 속에 성령이 계시고 외적생활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산다.
당시 수신자들의 모임에 구노시스파와 니골라당에 속한 이단자들이 들어 왔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부인하고
육신의 무죄론을 주장 하면서 색욕의 생활을 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가만히 들어온 자들은 하나님의 지키심을 얻은 은혜를 악용 하여 색욕거리로 바꾼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나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위와 명얘와 출세를 하게된 은혜를
도리어 잘못 이용하여 불경건한 색욕 거리로 바꾼다는 말이다.
자기의 지식과 기능을 악용하고 직명을 기회로 삼아 교회와 단체까지 악용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된 유다와 부르심을 입은 자들을 말한다.
모든 죄인을 사랑하고 원수와 핍박자를 사랑 하여야 하지만 가만히 들어온 확실한 이단자들은
우리 안에 있는자가 아니므로 그들을 우리 라고는 할수 없다.
그러나 이단의 죄를 미워 할것이고 사람을 미워 하여서는 않된다.
그리고 이단자들을 사귀거나 접대 하는 것은 동참죄이니 사귀지 말고,
청하여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는 그들에게 유혹을 받기 쉬울 것이요 위험 하기 때문이다 (요이 10-11 )
그러므로 확실히 이단자로 알거든 그들과 사귀지도 말고 인사나 접대도 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은 지, 정, 의를 갖춘 인격적인 신이시요 절대자시며 무소 부지 하신 신이다.
그느 능치 못하심이 없고 어디서나 계시면서 모든 일에 알파요 오메가 되신다.
하나님은 거룩 하시며 사랑과 공의를 겸유하신 신으로서 만유의 아버지시고 삼위일체 되신 신이시다.
본서에서 하나님은 아버지요 예정하시며 사랑을 얻게 하시고 지키시며 긍휼과 평강과 사랑을 더욱 많게 하신다 (1, 2 ).
하나님은 판결하시며 기록 하시고 (4 ),
구원 하시며 멸하시고 (5 ),
심판과 결박과 가두시는 신이시며 (6 ),
불로 형벌 하신다 (7 ).
그는 모세의 시체를 위하여 미가엘을 버내시며 (9 ),
예언을 주시고 (14 ),
정죄 하시며 (15 ),
능히 보호 하시고 지침이 없게 하시며 즐거움으로 우리를 영광 앞에 세우실 것이다 ( 24 ).
또 하나님은 홀로 하나이신 신이시고,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많고,
이제와 세세에 계시는 신이시라 (25 )고 유다는 하나님을 찬양 하였다.
은혜는 값없이 받는 것을 말한다.
즉 공로 없이 받는 것으로 아무 행함 없이 거저 받는 것을 뜻한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 : 24 ) 하였고
”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 (롬 4 : 4-8 ) 라고 인조 하였다.
그는 또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 (롬 11 : 5-6 ) 고 하였다.
인간의 모든 삶이 물론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의 생명과 천지 만물 그리고 살게 하여 주신 모두가 은혜이다.
그러나 여기사의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은 특별한 은혜를 말한다.
그것은 온 인류의 죄에서의 구원을 위하여 독생자를 주시고 또 그 독생자로 하여금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거 죽어시고 속죄의 값을 담당하게 하신 후
인간에게는 아무 의나 공로가 없이 죄를 회개 하고 믿기만 하면 사죄와 영생과
모든 영육의 축복을 함께 주시는 이 일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종으로 지위와 명예와 영광을 얻게 되는 일도 또한 은혜이다.
은혜는 내적 상태로 하나님과 자기 영과의 관계이다.
이 내적 관계인 하나님과의 영교가 있는 신자들은 외적 생활에 그 빛이 빛난다.
곧 은혜가 보인다.
감격과 감사와 평강과 충성과 봉사로 빛난다
세상의 마우 것도 이 은혜의 생활을 방해 하거나 저하 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그 능력으로 화한다.
은혜는 값없이 받는 것이니 무엇이나 값없이 받는 것은 은혜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다른 사도 보다 더 많은 핍박을 받고 수고한 일을 은혜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바울은 핍박과 욕을 당할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값없이 받은 것이므로 은혜라 아였으니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 : 15 ) 라고 표현 하였다.
우리는 이유 없이 욕과 핍박을 받을 때 그 은혜를 감사해야 할 것이다 (마 5 : 10-12 ).
도리어는 위의 것과 상반되는 방향으로 변할 때 쓰는 말이다.
가만히 들어온 자들은 선을 도리어 악으로 이용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러 바꾼다.
욱에 속한 성령이 없는 가만히 들어온 자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찬송과 기도를 한다.
이는 사기 협잡 하는 자들의 사기극에 불과 하다.
그들에게 성경과 찬송과 기도를 가르쳐 주는 일은 강도에게 무기를 주는 것과 같다.
색욕거리로 바꾼다는 것은 색상에 대한 욕망은 모두가 색욕이지만 (약 4 : 4 )
여기서는 주로 음란을 뜻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교계에 이름이 들어 날 때 그것을 악용하여 색욕거리로 바꾼다.
유다는 가만히 들어온 자들을 3 단체로 보았다.
3 단체는 다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변하여 색욕거리로 삼았다.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나온 주의 백성들이 음행 하다가 염병으로 2 만 4 천명이 죽었고 (민 25 : 1, 9 ),
하나님을 모시는 은혜를 받았던 하나님의 아들 들이 그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어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삼음으로 (창 6 : 1-4 ) 홍수의 심판이 있었으며 (마 24 : 37-39 ),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디른 색을 땅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다 (7 ).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치 않는 정욕대로 행하며 기롱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 (18)과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다더럽힌 옷이라도 싫어 하여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는 말씀 (23)은 모두 색욕에 관한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말하였다.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받후 2 : 2 ),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벧후 2 : 14 ),
“저희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여 미혹한 데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여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 (벧후 2 : 19-19 ) 하였다.
말세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자 곧 거짓 선지자와 거짓 선생들이 많이 들어와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 거리로 바꾸게 될 것을 미리 말한 것이다.
바울은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딤후 3 : 6-7 ),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딤전 4 : 1-3 ),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딤전 4 : 5 )하여 말세에 가만히 들어온 자들에 대한 예언을 하였다.
요한 사도는 심판 받을 말세의 음행하는 여인 곧 음녀라고 표현하여
말세에 이 색욕의 음행이 온 땅위에 가득 할 것을 예언 하였다.
색욕에 관한 사실을 성경에서 알아보자.
그 용어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척간, 수간, 시간, 강간, 다른색, 화간, 간음, 자위의 간음이 있다.
또한 정신적으로 세상을 사랑함이 간음하는 여인 (약 4 : 4 ) 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요한 3 가지를 논하려 한다.
간음과 다른색과 음란이다.
간음이란 남의 남녀끼리 짓는 죄를 말하며,
다른 색은 괴이한 색으로써 동성 끼리,
그리고 음란은 물론 간음과 다른 색이 모두 음란의 행위 이지만 부부간 이라도 경건의 도를 넘으면 음란 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히 13 : 4 ) 고 하였다.
음행은 하나님의 심판의 척도이다.
히브리서 13 : 4 에 하나님이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 하는 자들을 심판 하신다고 하였다.
이 음란으로 3 대 심판이 언급되었다.
처음은 노아의 홍수 심판이니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창 6 : 1-2 )가
홍수 심판의 주된 원인이었다.
예수께서도 말세에 있을 일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마 24 : 37-39 ).
인간들이 물질주의, 영락주의, 애정주의에 빠져 있다가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 후에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고을들을 심판 하셨다.
하나님의 천사가 롯의 집이 들어 샀을 때 “그들의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무론 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창 19 : 4-5 )고 하다가 불형벌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장차 이 세상 끝날 때 온 세상의 심판을 음녀의 심판 이라고 하였다 (계 17 :, 19 : )
음란 하므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음란은 하나님 심판의 척도이다.
비단 3 대 심판뿐 아니다.
어느 때 어디서나 누구든지 이 음란죄가 있을 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신다.
인류의 모든 역사는 개인이나 국가나 세계가 이 음란의 죄가 관영할 때 무참히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은란의 죄에도 하나님은 3 가지로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
사도 요한이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계 2 : 20-23 )는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였다.
침상에 던지는 것은 건강이 약하거나 병듦이요,
환난에 던짐은 무든 일이 다 않되어 시련에 빠진다 함이며,
그래도 회개치 않을 때는 자녀를 데려 가시고 그 다음에는 본인을 심판 하신다는 말씀이다.
이 음행죄도 회개하면 물론 용서된다.
그러나 회개 할 때에 마역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할 것이다.
부부간에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믿음이 없는 사이라면 역시 마역이 일어 날 것이다.
이 죄는 몸안에 있는 죄이므로 (고전 6 : 18 ) 회개 하기에 제일 난처한 죄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범죄한 눈은 빼어 내버리고 손은 찍어 내버리라고 하셨다 (마 5 : 29-30 ).
정말로 눈을 빼고 선을 찍어라는 뜻일까 ?.
이는 범죄한 오른 눈을 빼어 버리고 손을 찍어 버리면 그 눈과 손은 없어졌으므로 다시는 두번 범죄 할 수 없다.
여기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육신의 눈과 손을 없애 버리라 하심이 아니요 다시는 범죄치 않으면 된다는 말씀이다.
그 실례가 있다.
당장 음행 하다가 잡힌 여인에게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요 8 : 10-11) 고 하셨다.
그리고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않된다는 말씀 (마 5 : 32 ) 은 음행한 아내는 절대로
용서 할 수 없으니 버리라는 뜻이 아니다.
아내를 버리려고 하는 남성들에게 기어이 버리고 싶거든 음행의 연고가 있으면 이혼하라는 최하선의 말씀이다.
용서하고 인도 하여 더 사랑 하는 것은 성도의 당연한 일이다.
물론 하나님께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공로를 믿음으로 다시는 범죄치 않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사 1 : 18 ) 하셨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 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라도 하였다 (요일 1 : 9 ).
우리는 음행죄와 모든 죄를 자백하고 믿으면 완전히 사하심을 받는 것을 믿어야 한다.
만일 회개를 한 후에 다시 그 죄를 생각 하면 이는 자기 죄를 심각히 생각한 것이 겠지만
하나님의 약속 하신 말씀을 믿지 않은 죄에 빠지게 된다.
다시 말하거니와 하나님께 고백하고 용서 받음을 믿어 안심하고 다시 범죄 하지 않어야 한다.
구약 때 기생 라합 (수 6 : )과
다윗왕 (삼하 11 :, 12:, 시 51 : )이며
신약 때 사마리아 여인 (요 4 : )과 당장 음행 하다가 잡힌 여인 (요 8 : )들은
모두 회개 하여 사유를 받고 다시 법죄 하지 않은 자들이었다.
짐승의 피와 인간의 양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구약의 신자는 실범만 없으면 의가 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의 도우심을 얻은 신약의 신자들은
마음과 눈과 손으로 까지 범죄함이 없어야 한다 (마 5 : 27-32 ).
일남 일녀가 결혼하여 사랑하고 자녀를 생육하는 일은 간음이 아니라 신성한 일이다.
음행하지 말라는 말을 부부생활을 하지 말라는 말로 오해 하여서는 않된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 곧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생육하고 번성 하라 하셨다 (창 1 :, 3 : ).
에녹은 하나님과 3 백년을 동행 하면서 자녀를 낳았다 (창 5 : 22 ).
하나님과 동행함과 자녀를 낳는 부부생활을 힘께 한 것이다.
예수의 의부와 마리아는 아들을 낳기 까지 동침치 아니 하더니 (마 1 : 25 )
낳은 후에는 4 아들과 딸들을 낳았다 (마 13 : 55-56, 행 1 : 13-14 ).
주 안에서 부부 영육의 모든 생활은 신성하고 거룩한 축복이다 .
가만히 들어온 자들은 값진 것을 값없는 것으로 바꾸어 육체의 정욕을 누리다가 망한다.
본서 안에 주의 백성 들과 처소를 떠난 천사들과 소돔 백성들이 모두 잘못된 바꿈으로 멸망을 받았고
가인, 발람, 고라가 자기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썩을 육신의 것으로 바꾸었으며
기롱하는 무리들이 하나님과 진리의 힘보다 당의 힘을 의지하여 영생을 멸망으로 바꾼다.
에서도 장자의 기업을 팟죽 한 그릇과 바꾸어 망했다 (히 12 : 16, 창 25 : 33-34 ).
바울은 로마교회에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롬 1 : 23-25 )고 하여
잘못 바꿈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리하여 남녀들이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둣 하매
심지어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한다고 하였다 (롬 1 : 26-27 ).
그러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정반대로 바꾼다,
모세는 애굽왕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으로
바꾸었으니 잠시 죄악의 날을 누림보다 영원한 의의 낙을 누리려고 바꾼 것이다.
애굽의 보화 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더 큰 재물로 여겨 바꾸었다 (히 12 : 24-26 ).
바울도 자기의 모든 것을 해롭고 배설물 같은 것으로 다 내어 바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하여 그리스도를 얻는 것으로 바꾸었다 (빌 3 : 7-8 ).
예수께서 갈릴리 해변에서 바드로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마 4 : 19 )고 하여
보다 더 높은 어부로 바꾸라 하셨다.
또 인간들의 값없는 무거운 짐과 멍에를 벗어 버리고 예수의 멍에와 짐은 쉽고 가벼운 값진 것이니
바꾸어 지라고 하셨다 (마 11 : 28-30 ).
때로는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다는 가치론을 말씀 하셨고 (마 6 : 25 ).
일은 하되 썯을 양식을 위하여 하지 말고 영생 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더 ( 요 6 : 27 ).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보다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 하라는 말씀으로 (마 10 : 28 ) 두려움의 대상자를 바꾸라 하신다.
뿐만 아니라 부모 형제와 처자 및 자기 목숨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씀은
모든 것을 팔아 값진 보화 곧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제자가 되라는 것이었다 (눅 14 : 25-35 ).
마치 자기 소유를 다팔아 값진 진주와 보화로 바꾸어 가지라고 하심과 같다 (마 13 : 44-45 ).
신자가 죄가 있을 때에는 차라리 웃음으로 애통하고,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어야 한다 (약 4 : 9 ).
우리는 지혜있게 바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영육간 값진 것으로 값싼 것을 바꾸는 자는 망하며,값싼 것으로 값비싼 것을 바꾸는 자는
살게 되기 때문이다.
“홀로 하나이신 주제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 하는자” 는 가만히 들어온 자들의
하나님께 대한 생태이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자들이다.
첫째, 그때 교회 안에서 활동하던 구노시스파이니 그들은 자기들의 철학적인 지식으로 해석하여
사도들이 전하는 주 예스 그리스도를 부인 하였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뜻대로의 진리를 부인 하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삼위 일체 되신 하나님이 아니며 또한 인간이 구원 얻는데 육체러 지은 죄가
아무 지장이 없다며 속죄가 필요 없다고 하였다.
둘째, 현대 세계교회에 하나님이 죽었다는 사신론과
죄는 원가가 없으며살황에 따라 다르다는 상황 윤리를 지지하는 자들이다.
셋째, 위와는 달리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자들 가운데
실상으로 부인 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교회 안의 직분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다든가 부인함이 아니다.
입으로는 열심히 주를 부르지만 그 중심과 실제 샐활애소 예수를 부인한다는 말임을 명심 하여야 한다.
홀로 하나이신 이를 부인함은 홀로 하나이신 그로 하여금 교회 안에서 하나이시게 하지 않고
자기가 주장이 되어 또 다른 하나가 되는 것이 홀로 하나이신 이를 부인 함이 된다.
주재를 부인 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을 주.재로 알지 않고
자기 뜻대로 자행 하는 것으로 볼수 있다
주를 부인하는 것도 역시 예수를 주로 모시지 않고 자기가 주장 하는 것을 뜻한다.
그들은 실상 배로 하나님을 삼고 (빌 3 : 19 ),
두 주인 곧 하나님과 재물 중에서 침 주 되신 이보다 재물을 주로 섬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 6 : 24 ).
예수를 부인 함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 하실 자라는 그일을 입으로는 말하지만
실상은 회개와 믿음으로 구원되는 일에 참예 하지 않음을 말한다.
예수를 전한다 하면서 예수를 부인하는 자들이다.
바울은 “다니는 사람중에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가 많으니라” (빌 3 : 18 ) 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러 다니는 자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라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성경을 지키며 가르치는 자가 크다고 하셨다 (마 5 : 19 ).
그러나 성경보다 지식과 학설을,
성경보다 신비를,
하나님보다 교파와 단체를 숭상하는 자들이다.
세례 요한은 가장 성결하다고 자처하는 바라세인과 지성을 자랑하는 사두개인이
그에게 옴을 보고 독사의 자식이라고 책망 하면서 아브라함을 그들의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고 하였다 (마 3 : 7-8 ).
요한 사도는 자칭 유대인의 회를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고 하여 (계 2 : 9 )
명실이 상부 하지 않을 때의 상반된 사실을 책망 하였다.
본서 중의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가 바로 홀로 하나이신 주재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이다.
그리스도를 부인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라는 뜻 곧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 되시는 모든 진리와 사실을
말로는 시인하지만 생활에서 부인 한다는 말이다 .
이상과 같이 입으로는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만
그실상은 자기들의 불경건한 정욕을 따라 사는 것으로 부인한다.
이외에도 말세가 되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을 정면에서 부인하는 거짓 선지자와
거짓 스승도 있을 것이다 (벧후 3 : 3-4 ).
부인함에 있어 사실을 정면에서 부인 함과 언행의 상반으로 결국 부인 하게 되는것
그리고 실상은 부인 할 수 없는 베드로가 연약하여 순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과 같은 것들이 있다.
또한 알고도 부인함이 있지만 알지 못하여 하는 부인도 있다 .
좋은 뜻의 부인도 있고 나쁜 뜻의 부인도 있다.
그러나 본서의 부인은 배신의 부인 곧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는 자들이 하는 배반의 부인이다.
이 부인은 바로 배반이며 배반은 거스린다는 말이다.
가만히 들어온 자들의 특성 중의 하나는 거스리는 배반으로 누구에게나 어떤 일에나 거스린다.
그러나 바른 믿음을 지닌 사람은 어디서나 온유와 겸손을 신종한다.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 하여 죽도록 충성 하여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유다서의 문안과 목적에 대하여 풀이 하였다.
곧 유다서의 서론이다.
상세한 이해와 깊은 반성으로 우리는 가만히 들어온 자가 되지 말고
그들에게 유혹도 당하지 말며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되어 힘써 싸워야겠다.
긍휼과 평강과 사람이 충만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