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4월 2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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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고대 중국에 끼친 영향

고대 한국인이 고대 중국에 끼친 영향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왼쪽 그림은 중국인들은 고궁(古宮)이라고 부르고, 우리들에게는 자금성(紫禁城)이라고 알려져 있는 베이징의 왕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중국인들의 기원에 대해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셈의 장자들인 엘람과 앗수르 가문이 동방으로 대장정을 시작했을 때 셈의 장막에 거하면 복을 받으리라는 노아 할아버지의 명령을 따라 야벳 가문의 일부가 따라 나섰습니다. 또한 함의 맏아들인 구스 가문의 일부도 셈족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래서 야벳이 주축을 이루고 구스도 일부 섞인, 그리고 셈 가문 여자들을 며느리들로 맞아들여 다양하게 섞여버린 그들이 지금의 중국인들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대로 사마천의 사기 오제본기에 요의 아버지는 곡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곡은 아벳의 아들인 곡, 마곡과 연결이 됩니다. 또 서전요전에 보면 요임금의 대를 이은 순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순의 아비는 고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수는 함의 아들 구스와 연결되고, 구스의 아들이 순이 됨으로써, 고대중국의 왕조와 성경의 족보가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고대 중국의 문화를 잠깐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중국인과 한국인의 관계를 알기 위해서는 문화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크게 두 개의 문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앙소문화권(仰韶文化圈)과 용산문화권(龍山文化圈) 두 가지입니다.
앙소문화권(仰韶文化圈)은 서남문화권(西南文化圈)이라고도 하는데 설립자는 중국인 스스로이고, 중국의 남쪽에 있으며, 하남성 앙소촌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규모는 소규모이고 원시적이고 상당히 시시합니다. 그런데 중국의 대부분의 훌륭한 문화권을 이루고 있는 용산문화권(龍山文化圈)은 놀랍게도 설립자가 동방족 혹은 동이족이라고 불리는 고대 한국인이 세운 것입니다. 그래서 용산문화권은 다른 말로 동방문화권(東方文化圈)이라고 부릅니다. 그 중심은 산동반도의 용산현 근처입니다. 용산문화권은 중국문화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찬란했던 문화권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중국인 고고학자들이 밝힌 사실들입니다. 이러한 중국역사의 문화적 배경을 보면 중국이라는 나라는 동이족들, 곧 한국인들이 도와줘서 그 기틀을 세웠구나 하는 것을 당장에 알 수 있습니다.

산동성의 용산문화권은 고대 동방으로부터 파견된 동방족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중국인들은 중국으로 파송된 동방족들을 ‘소호 금천(金天)씨’라고 불렀습니다.
중국인의 역사 기록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소호족이 거하던 곳은 중국대륙의 동해 바깥쪽에 있었는데, 바로 요동반도였으며, 거기서 들어와서 산동반도(山東半島)에 거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고구려 시대까지만 해도 요동반도는 우리 땅이었습니다. 요동에 거하던 동방족들이 중국인들을 도와 주다가 도와 주다가 끝이 없으니까, “에라, 안되겠다. 아예 중국에 들어가서 살면서 도와주자” 하고 산동반도로 들어가 살면서 돕게 된 것입니다. 그 산동반도 지역이 완전히 코리아타운으로 화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소호는 동쪽의 해 돋는 곳 (해가 돋을 때 동쪽 하늘이 금빛으로 물들지요?) 금빛 하늘에서 왔다하는 의미에서 쇠 금(金)자 하늘 천(天)자로 금천(金天)씨가 된 것입니다. “금천(金天) 땅에서 왔다”고 해서 이들은 금천(金天)이라는 성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들은 중국으로 파견된 동방족 출신의 엘리트 지도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고대 한국인들은 중국인들이 요를 중심으로 새 땅을 개척하기 위해 떠날 때 그들을 돕기 위해 산동반도로 많이 따라갔던 것입니다. 아직 자립이 안 되고 기술도 부족하고 홍수가 나면 대책이 없었거든요. 그 모든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들어가서 도왔던 것입니다. 요의 대를 이어 지도자가 된 순을 도와줬던 사람은 ‘부루(夫婁)’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루(夫婁)는 한국의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는 단군(檀君)의 아들이었고, 이 부루(夫婁)가 금천(金天)씨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금천(金天)씨란 특정한 혈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을 통틀어 코리언(Korean)이라 하듯, 그 당시에 금천(金天)씨라 부른 것입니다.
산동반도에 파견된 소호 금천씨와 자손들은 모두 중국남방의 형제들을 말씀으로 가르치고 양육한 하나님의 파수꾼들이었던 것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우리나라 명성황후 시절에 한반도에 들어와 복음을 전하던 선교사님들과 같습니다. 그들은 의료인으로, 혹은 기술자로 들어와서 병원도 짓고 기술도 가르치고 학교도 세우면서 신앙도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리고 신라 김유신 장군의 비석과 삼국사기 열전에 의하면, “김유신은 헌원의 후예이고 소호 금천씨의 자손인데, 그는 가야 왕의 후손이므로 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의 성도 그의 동성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헌원입니다. 이 헌원은 한자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지, 이 이름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후난, 즉 셈의 자손인 앗수르 가문의 족보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라는 유적으로 보나 삼국사기로 보나 성경으로 보나 엘람 형님, 제사장 형님을 도와 행정과 정치, 경제, 군사 업무를 장악하고 있던 셈의 둘째 아들 집안인 정통 기마민족인 것이 가장 유력합니다.
즉, 소호 금천씨는 니므롯에 의해 밀려난 앗수르의 헌원의 직계자손이며 셈과 야벳과 함의 일부 형제들을 이끌고 약속의 땅 동방을 찾아서 대장정을 감행한 주도세력이었던 것입니다.

왼쪽의 지도를 보시면, 요동반도에 거하면서 중국인들을 도와주다가 아예 산동반도 근처로 들어와서 살았던 사람들이 바로 고대 한국인들이었던 금천(金天)씨들이고, 그들이 신령한 장소로 지정해서 (아마 아라랏산을 형상화했겠지요) 정한 곳이 바로 태산이라는 지역입니다. 지금도 중국사람들이 가장 신성한 곳으로 여기는 곳이 바로 여기 태산이고, 중국 역사에 의하면 금천씨들, 즉 동방족들이 살던 곳이 바로 태산 지역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태산 바로 옆이 곡부입니다. 곡부는 무엇으로 유명합니까? 중국 정신사에 매우 중요한 공자가 바로 곡부에서 태어난 사람이며 그가 동방족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자는 기원전 500년경 사람입니다. 그 조상은 기원전 2000여년경에 여기 와서 살았고, 그 이후 공자가 태어난 것이지요. 그래서 중국의 문화도, 종교도, 정신세계도 거의 다 동방족이 이루었다는 사실을 중국역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은 오히려 근래에 이르기까지 사대주의에 빠져서 “황공하옵게도 우리가 어찌 대국인 중국을 가르쳤습니까? 우리가 중국에서부터 배워 온 것이지요.” 하면서 그 모든 것을 숨기고, 지우고, 왜곡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중국의 역사책까지 쫓아 가서 지울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중국의 역사책에는 이 대부분의 내용들이 남아있게 된 것입니다.

오른 쪽 그림은 태산으로 올라가는 길입니다. 중국의 역사에 보면 유명한 산이 다섯이 있습니다. 그 중에 태산이 가장 중요한 산이라 하여 오악지종(五岳之宗)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랫쪽 그림은 태산의 정상인데요, 태산의 정상은 완전히 성전(聖殿)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태산의 정상에는 천상신(天上神), 곧 하늘 황제인 상제(上帝)신의 성전(聖殿)이 지어져 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허물어지고 새로 세워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원래의 모습이 아니고 불교식, 유교식으로 건물모양이 변화되어 세워지게 되었을 뿐이지, ‘천상신부’라 하여 상제신을 섬기던 정신은 그대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맞은편을 보면, 상제신을 섬기던 제사장 소호 금천(金天)씨의 무덤이 있습니다(아래 오른 쪽). 소호 금천씨 무덤에는 그 아래의 그림과 같이 금천씨 상이 있습니다. 금천(金天)씨가 금(金)씨, 금(金)씨가 김(金)씨가 되어 현재 우리나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성(姓)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중국의 고대 역사를 살펴보면, 중국은 전설적인 다섯 왕이 있습니다. 황제, 전욱, 제곡 그리고 요 임금, 순 임금입니다. 이미 순임금 시절에 상제(上帝)신에게 제사를 드렸다고 공자의 서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가 기원전 2230년경입니다. 바벨탑 사건이 기원전 2247년경이니까 바벨탑 사건이 터지고 17년 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리고 황제, 전욱, 제곡은 중국인들의 조상이지만, 메소포타미아에 살던 중국인의 조상이고, 이후 동방으로 오면서 엘람과 앗수르 가문과 함께 동행했던 중국인의 조상은 아마도 요임금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임금이 아사달에서부터 중국인들을 인솔하여 중원대륙으로 들어갔고, 순임금 때 중원에 자리를 잡아서 안심하고 제사를 지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순임금 다음으로 왕조가 들어섰는데, 하나라, 은나라, 그 다음에 주나라, 그 다음에는 진시황이 통일국가를 세운 진나라,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한나라, 수나라, 당, 송, 원, 명, 청나라 순으로 내려갑니다. 결국은 전설적인 왕 다음에 실질적인 중국의 왕들은 바벨탑 사건 이후부터 시작되어 요임금, 순임금 시대, 그리고 그 후 하-은-주, 진, 한-수-당-송-원-명-청 이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중국의 간단한 역사입니다.

그러면 고대 중국에 끼친 한국의 역할을 알기 위해서 몇 가지 기록을 읽어보겠습니다. 서전 호서에 기록된 것을 보시면, 순의 제자 우(禹)는 장가를 잘 가서 출세한 사람입니다. 어디로 장가를 갔는가 하면 동방족의 도산국 여자와 결혼하였으며, 그 처갓집이 똑똑한 사람들이 많아서 처가의 도움으로 황하의 홍수를 해결하여 명성을 얻고 순임금의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역대 신선통감 제 3권에 보시면 앞의 글과 연결이 됩니다. 순의 제자 우는 형산에서 창수사자(蒼水使者)로부터 금간옥첩(金簡玉牒)이라는 비결책을 얻었던 것입니다. 이 금간옥첩(金簡玉牒)이 최초의 토목공학 원서가 되겠지요.
창수사자(蒼水使者)란 누구인가에 대해 세종실록지리지 평양부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는 도산(塗山)회의에 참석한 부루(夫婁)로부터 금간옥첩(金簡玉牒)을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창수사자란 동방족 출신의 지도자로 단군의 아들인 부루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가의 도움이라는 것은, 중국인 우의 처가는 한국의 왕족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는 코카시안(Cocasian)의 얼굴을 가졌던 중국인들이 자꾸 한국인 얼굴처럼 변한 것입니다. 그러나 말과 문화와 의자생활과 볶고 튀겨 먹는 문화는 그대로 남아서 지금의 중국의 모습이 된 것입니다.

또 우(禹)는 동방의 지도자를 방문하여 가르침을 받고 중국의 역법과 절기를 모두 동방의 것에 맞추었다고 중국의 정사인 사마천 사기 오제본기 (史記 五帝本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요, 순, 우 로 이어지면서 한번도 세습을 하지 않고 능력위주로 왕의 자리를 이었는데, 우는 자신의 아들 계에게 자리를 물려주어서 이 세습된 지도체계는 곧 반발에 부딪혀서 혼란을 야기했습니다. 그때 설의 아들인 탕이 강력한 지도체계를 확립하고 대륙의 질서를 바로 잡았는데, 이 탕은 곧 산동반도에 들어와 있던 동방족 출신의 지도세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탕의 시대로부터 동방족이 직접 중국대륙을 치리 하였는데, 이렇게 한국인이 통치하던 시기가 바로 하-은 시대입니다.

그리고 중국인들이 섬기던 신은 샹따이 로서 히브리인이 섬기던 하나님 엘 샤다이 와 발음도 뜻도 같다는 것을 고대 중국인들의 국경제사문 (國境祭祀文)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극히 오래 전 태초에 공허하고 흑암의 큰 혼돈이 있었사옵니다. 다섯 행 성은 아직 운행되지 않았었고 태양도 달도 빛을 발하지 않았었습니다. 거룩 하신 신 상제(上帝)께서 이곳에 모든 만물을 지으셨습니다. 주께서 모든 만물을 만드셨사옵니다. 그리고 사람을 지으셨사옵니다. 당신의 능력으로 모든 만물이 지음을 받았사옵니다.”

위의 국경제사문(國境祭祀文)과 기독교인이 믿는 경전인 성경(聖經) 창세기(創世記) 1장의 내용과 비교해 볼까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 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리라… 하나님이 두 큰 광명 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자기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 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세기 1장 1절-27절)

상제(上帝)를 창조(創造)의 신(神)으로 묘사함으로서, 국경제사문(國境祭祀文) 의 내용과 창세기(創世記) 내용이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다른 국경제사문 (國境祭祀文)을 보시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생물들이 당신의 뜻으로 말미암았나이다. 上帝시여, 인간도 만물도 모두가 당신의 사랑으로 이 낙원에 살게 되었나이다. 모든 생명체가 당신의 선 하심으로 지음 받았사오니, 그 축복은 당신으로 말미암음이옵니다. 오 주시 여, 당신만이 이 모든 만물의 참 어버이가 되시옵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에도 기독교 이외에는 이런 기도문이 없습니다. 제사문이라 는 것이 결국 신(神)에게 드리는 기도문(祈禱文)인데, 바벨탑 사건이후 하나님을 기억하던 백성들이 동방으로 이주해온 후 하나님을 기억하며 드렸던 기도문으로 생각됩니다.

공자(孔子)의 중용(中庸)에 보면 제사란 무엇인가가 기록되어 있는데, “하늘과 땅에 드리는 모든 제사를 통해 사람이 상제(上帝)를 섬기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원래의 공자(孔子)는 하나님을 섬기라고 말하고 있지만, 가짜 공자가 판을 치면서 진짜 상제(上帝)인 하나님에 대한 소식이 들어 왔을 때 얼마나 핍박을 주었습니까? 그래서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것처럼, 어용학자들이 만든 가짜 공자가 죽고 상제를 섬기는 진짜 공자가 살아야 나라가 잘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직접 한국인이 통치하는 하나라 은나라(夏-殷시대)가 지속되다가 14대째 지도자인 한국인 주(紂)가 난폭하여 중국인인 주(周)의 서백창(西佰昌)에게 쫒겨나고 주(周)나라가 통치하였습니다. 그 후로 얼마가지 않아 또 여러 나라로 갈려 혼란이 거듭되다가, 마침내 중국최초의 황제인 시황제(오른 쪽)가 나타나서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통일하고 진(秦)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메소포타미아 (바빌로니아) 지역과 장사를 하여 수많은 돈을 번 장사꾼 여불위가 제국을 세우고자 하는 뜻을 가졌는데, 이를 알고 그의 아들 여정이 아버지를 제거하고 통일제국을 이룬 것이 시황제의 진나라입니다. 그래서 이 진(秦)나라는 서구사회에 중국이 알려진 최초의 나라가 되어서 지나(秦) – 차이나가 된 것입니다.

장사꾼 여불위의 혈통인 진시황제 정(政)은 바벨론의 악한 문화를 받아들여서 그때까지 받들던 선한 천사의 상징 봉도등(鳳圖騰)을 포기하고 용을 황제의 상징으로 받아들이고 깃발도 용도등(龍圖騰)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때부터 하나님과의 결별을 선언했던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백성들과 학자들이 종교의 자유를 달라, 민주화를 하라 외치니까 큰 압제를 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진시황은 산동(山東) 곡부(曲埠) 출신 공자(孔子)가 하늘의 도리를 가르치고자 지은 많은 책들을 모두 불사르고 가르치는 학자들을 생매장하여 죽인 분서갱유(焚書坑儒) 사건입니다.

왼쪽 그림은 공자의 집 벽 곧 노벽(魯壁)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아무리 공자의 제자를 생매장하고 그 책을 다 불태웠어도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의 집 벽안에 숨겨 놓은 책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공자의 집이 많이 허물어지면서 그 벽 속에서 공자의 책들이 발견되게 되었습니다.

옛날 책들은 오른 쪽 아래 그림과 같이 대나무 쪽에 기록해서 서로 연결하여 보관하였습니다. 이 책이 발견되면서 공자의 뜻이 잠시 빛났건만 그 당시 정권인 한나라의 어용 정치학자들이 임금에게 해로운 말은 빼고 필요한 말로 바꾸어서 원본은 숨기고 금문학파라고 해서 어용 유교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전 중국과 한국에까지 전파되어 이것이 진짜 공자의 가르침인줄 알고 잘 못 가르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금문학파의 조작 사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왼쪽 아래는 공자의 집에 남아 있던 우물입니다.

이제 진시황은 아사달과의 사이에 만리장성(萬里長城, 아래 그림)을 쌓음으로서 동방족 사람들이 만리장성을 넘어오지 못하게 하여 종교의 자유운동을 완전히 잠재우므로 써 중국은 하나님과의 그리고 동방과의 결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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